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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Dec 26. 2019

언니 vs. 누나

언니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적잖이 많은 누나들 밑에서 자랐지만 여성스러운 면이 별로 없는 편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잘 우는 편이었지만 감성이 풍부한 탓이었다. 양말에 구멍이 나 발가락이 빼꼼히 나온 아이를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시렸지만 착한 심성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아빠보다 엄마를 더 사랑하고 이해했지만 고만할 때는 어떤 사내아이나 그렇지 않은가. 나는 보통의 남자아이였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누가 봐도 누나들의 영향이라 할만한 점이 있었다. 누나들을 '언니'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지금은 누나라는 호칭이 너무 자연스러워졌지만,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누나들을 누나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었고, 부를 때마다 의식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언니라는 말이 먼저 입 밖으로 나왔다. 앞에 있는 누나를 부르려고 한참을 망설이기도 했다. 누나라는 말이 입에 붙을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국민학생일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 때문에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다. 하지만 정작 놀리는 사람의 수준이 유치한 것이라고 생각했지, 놀림당하는 내 쪽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디서 들어주은 바 예전에는 남자들도 손위 사람을 부를 때 언니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다지 않은가. 호칭을 (언니에서 누나로) 바꿔 불러야겠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언니라는 호칭을 그만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였다. 누가 뭐라고 한 사람도 없는데, 아이들이 있을 때 언니라고 부르는 것이 왠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몇십 년을 자연스럽게 써온 말인데 더 이상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딱히 그럴 이유는 없었다. 한 번도 언젠가는 누나라는 호칭을 써야지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집에서 가끔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했다. 게임하는 것을 아내가 그리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한번 하는 것이라 눈감아 주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스타크래프트 게임 CD를 버렸다. 아이에게 게임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이와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언니라는 낱말을 찾아보니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언니라는 말은 19세기  말까지 우리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우리말을 표제어로 하여 편찬한 최초의 국어사전(필사본)인 <국한회어國漢會語>에도 언니라는 낱말은 없다는 것이다. 일본어에 형이나 오빠를 일컫는 ‘ani’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언니의 어원 역할을 하였는지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전에 일본어가 백제어의 영향을 얼마나 받았는지의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편찬된 우리나라 최초의 활자본 국어사전인 <조선어사전>(1938)과 한글학회의 <큰사전>(1957)에 비로소 언니라는 말이 수록되어 있는데, <조선어사전>에는 '형과 같음'의 풀이이고, <큰사전>에는 '형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물론 현대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이이거나 일가친척 가운데 항렬이 같은 동성의 손위 형제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주로 여자 형제 사이에 많이 쓴다.'라고 풀이되고 있다. '주로' 여자 형제 사이에서 많이 쓴다는 표현이 좀 애매하기는 하다. 그래도 동성의 손위 형제를 부르는 말이므로 내 경우에는 어쨌든 해당되지는 않는다. 


  호칭이 언니에서 누나로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나들은 여전히 나를 소중하게 생각했고 사랑해 주었다. 내 마음도 물론 변함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언니라는 말은 내게 편안하고 친근한 호칭임은 틀림없다. 누나라는 호칭은 다소 예의와 격식이 갖춰진 말로 느껴진다. 다음 설에 고향 집에 가면 슬쩍 언니라고 불러봐야겠다. 오랜만에 내게서 언니라고 불리면 누나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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