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에 들어갈 정답은 무엇일까요?
여름 농사를 끝낸 8월 말에는 텃밭을 갈아엎고 가을 농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농부'의 삶이란 그러합니다. 첫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쉼표란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고작 한 평 주제에 감히 농부를 사칭하다니 저도 참 뻔뻔합니다,라고 말해도 손바닥만 한 땅덩어리지만 마음먹으면 할 일은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올해는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 추석 연휴 중 겨우 하루 날을 잡아 가을 농사의 첫 삽을 떴습니다. 예년에 비하면 무려 두 주나 늦었습니다.
평소라면 '올해 가을 농사는 시작하기도 전에 망했네.'라고 넋두리했을 테지만, 마음 한 편에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끝나지 않는 무더위 말입니다. 지긋지긋한 늦더위 덕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만, 게으름의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땅은 거짓말하지 않아!' 월요일 애국 조회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주문을 읊조리며 배추와 무 모종 한 판을 들고 텃밭으로 향합니다. 뒤에는 여지없이 미운 오리 새끼 마냥 입을 쭉 내민 둘째 아이가 따릅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이몽룡이 춘향이를 만난 나이라나, 아직도 텃밭에 따라가야 하냐고 거세게 반발하는 걸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미끼로 어르고 달랬습니다. 역시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습니다. 자식도 품 안에 있을 때나 내 자식입니다.
어느 해보다 뜨거웠던 계절의 흔적들이 텃밭에 한가득입니다. 한 달간 다녀가지 않았더니 인도네시아 어느 외딴섬 무시무시한 밀림이 우리 텃밭에 눌러앉았습니다. 여름의 끝자락을 불태우려는 듯 오이와 가지의 마지막 결실들이 무성한 잎사귀 사이사이 '날 좀 데려가라고!' 아우성칩니다. 파릇파릇하던 방울토마토와 고추들도 빨갛게 상기되어 게으른 농부를 기다립니다. 뻘에서 무심코 캐낸 조개에서 진주를 발견한 것처럼 계절이, 자연이 내어준 선물을 정신없이 쓸어 담습니다. '아, 이 맛에 농사짓지.' 콧노래가 절로 나오다 불과 10분도 지나지 않아 흥은 온데간데없고 굵은 땀방울이 빗물처럼 내립니다. 아, 이번 여름 정말 지독합니다.
두 시간여 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하지만 정작 배추 모종 4개, 무 모종 10개를 심는 데는 15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찬란했던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했습니다. 마무리로 물을 주는데 여전히 오리주둥이를 한 둘째 아이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아빠, 무하고 배추는 매번 실패하면서 왜 해마다 심는 거야?" 하긴 가을 농사는 제대로 거둬들인 적도 없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놀리기는 아깝잖아."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뭔가 멋진, 아빠다운 말을 찾느라 수억 개의 뉴런이 빛의 속도로 움직입니다. 중력이 너무 강해 시간이 멈춰버린 '사건의 지평선'처럼 그 순간 세상도 멈춘 듯합니다. 섬광, 번뜩이는 빛줄기 하나가 블랙홀을 뚫고 나옵니다.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제 머릿속이니 가능합니다. "고라니, 고라니 가족이 맛있게 먹잖아. 그거면 충분하지." 이보다 멋진 답이 있을 수 있을까요. 대견해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을 지경입니다. "오, 아빠 멋진데, 역시 아빠가 최고야!"라고 빈말이라도 해주면 고맙겠지만, 삐죽 내민 입은 여전합니다. 어차피 제 말에는 1도 관심 없는 표정입니다. 도대체 왜 물어본 거냥!
한 평 텃밭의 가을맞이를 마무리하고 모처럼 아이와 오순도순 손을 맞잡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라고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하고 싶지만, 웬걸요. 아이는 어느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뺐습니다. 할 일 다 했으니 오늘하루는 터치하지 말라는 씁쓸한 경고를 날리고…. 한 평 텃밭 건사하는 것보다 자식 농사하기 정말 힘들구나 절실히 깨달은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