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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Sep 25. 2024

OO 농사, 정말 어렵다!

OO에 들어갈 정답은 무엇일까요?

여름 농사를 끝낸 8월 말에는 텃밭을 갈아엎고 가을 농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농부'의 삶이란 그러합니다. 첫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쉼표란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고작 한 평 주제에 감히 농부를 사칭하다니 저도 참 뻔뻔합니다,라고 말해도 손바닥만 한 땅덩어리지만 마음먹으면 할 일은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올해는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 추석 연휴 중 겨우 하루 날을 잡아 가을 농사의 첫 삽을 떴습니다. 예년에 비하면 무려 두 주나 늦었습니다.  


평소라면 '올해 가을 농사는 시작하기도 전에 망했네.'라고 넋두리했을 테지만, 마음 한 편에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끝나지 않는 무더위 말입니다. 지긋지긋한 늦더위 덕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만, 게으름의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땅은 거짓말하지 않아!' 월요일 애국 조회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주문을 읊조리며 배추와 무 모종 한 판을 들고 텃밭으로 향합니다. 뒤에는 여지없이 미운 오리 새끼 마냥 입을 쭉 내민 둘째 아이가 따릅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이몽룡이 춘향이를 만난 나이라나, 아직도 텃밭에 따라가야 하냐고 거세게 반발하는 걸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미끼로 어르고 달랬습니다. 역시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습니다. 자식도 품 안에 있을 때나 내 자식입니다. 


어느 해보다 뜨거웠던 계절의 흔적들이 텃밭에 한가득입니다. 한 달간 다녀가지 않았더니 인도네시아 어느 외딴섬 무시무시한 밀림이 우리 텃밭에 눌러앉았습니다. 여름의 끝자락을 불태우려는 듯 오이와 가지의 마지막 결실들이 무성한 잎사귀 사이사이 '날 좀 데려가라고!' 아우성칩니다. 파릇파릇하던 방울토마토와 고추들도 빨갛게 상기되어 게으른 농부를 기다립니다. 뻘에서 무심코 캐낸 조개에서 진주를 발견한 것처럼 계절이, 자연이 내어준 선물을 정신없이 쓸어 담습니다. '아, 이 맛에 농사짓지.' 콧노래가 절로 나오다 불과 10분도 지나지 않아 흥은 온데간데없고 굵은 땀방울이 빗물처럼 내립니다. 아, 이번 여름 정말 지독합니다. 


두 시간여 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하지만 정작  배추 모종 4개, 무 모종 10개를 심는 데는 15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찬란했던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했습니다. 마무리로 물을 주는데 여전히 오리주둥이를 한 둘째 아이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아빠, 무하고 배추는 매번 실패하면서 왜 해마다 심는 거야?" 하긴 가을 농사는 제대로 거둬들인 적도 없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놀리기는 아깝잖아."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뭔가 멋진, 아빠다운 말을 찾느라 수억 개의 뉴런이 빛의 속도로 움직입니다. 중력이 너무 강해 시간이 멈춰버린 '사건의 지평선'처럼 그 순간 세상도 멈춘 듯합니다. 섬광, 번뜩이는 빛줄기 하나가 블랙홀을 뚫고 나옵니다.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제 머릿속이니 가능합니다. "고라니, 고라니 가족이 맛있게 먹잖아. 그거면 충분하지." 이보다 멋진 답이 있을 수 있을까요. 대견해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을 지경입니다. "오, 아빠 멋진데, 역시 아빠가 최고야!"라고 빈말이라도 해주면 고맙겠지만, 삐죽 내민 입은 여전합니다. 어차피 제 말에는 1도 관심 없는 표정입니다. 도대체 왜 물어본 거냥!

<작년 가을 농사의 수혜자가 바로 고라니 가족이었습니다!>

한 평 텃밭의 가을맞이를 마무리하고 모처럼 아이와 오순도순 손을 맞잡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라고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하고 싶지만, 웬걸요. 아이는 어느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뺐습니다. 할 일 다 했으니 오늘하루는 터치하지 말라는 씁쓸한 경고를 날리고…. 한 평 텃밭 건사하는 것보다 자식 농사하기 정말 힘들구나 절실히 깨달은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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