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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an 28. 2020

사랑, 상실 그리고 희망

고전의 재味발견 : 상실의 시대 

  누군가가 가장 좋아하는 외국 작가를 물어보면 주저하지 않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을 가장 먼저 언급한다. 딱히 취향이 독특하지 않고 다소 키덜트(kidult) 성향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어른을 위한 판타지 동화 같은 세계를 그려내는 하루키가 제격이었다. 그의 신작 소식이 들리면 언제나 설레었고, 출간일에 맞춰 서점으로 달려가곤 했다.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 외에도 단편집, 대담집에 글쓰기 책까지 대부분의 책들도 소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루키 덕후는 아니어서 소설 제목만 대면 그 책의 문장을 줄줄 읊는 수준도 물론 아니다. 그냥 적당히 남들 좋아하는 만큼에서 1을 더한 것 정도로만 좋아한다. 그리고 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단연 <상실의 시대, 원제 : 노르웨이의 숲>때문이다.      


  <상실의 시대>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새내기 때였다. 당시에는 15만 원의 용돈으로 한 달을 살았는데 학관 식권을 서른 장쯤 구입해 두고 남은 돈으로 친구들과 <인디아나>라는 호프집에서 생맥주와 푸짐한 7천 원짜리 돈가스 안주로 한 끼를 해결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러고도 여유가 되면 학교 앞 작은 책방에서 책을 한 권씩 사곤 했는데 그때 우연히 집어 든 것이 바로 <상실의 시대>였다. 솔직히 그때는 무라카미 류인지, 무라카미 하루키인지 작가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누나 책상에 꽂힌 무라카미 누구를 본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었으니 한 번쯤 읽어볼 만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선택했던 것 같다. 


  아직 이렇다 할 연애 경험 한번 없는 나에게 주인공 와타나베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때는 ‘인생’이나‘상실’의 의미에는 아직 닿지 못할 나이었다. 오히려 ‘사랑’또는 ‘육체적 사랑’에 온통 관심이 가있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시기였다. 그렇게 <상실의 시대>는 말랑말랑하게, 하지만 조금은 아프게 20대의 나에게 다가왔다.      


  그 후 30대, 40대 삶의 전환기마다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머리가 썩 좋은 편이 아니라서 그런지 몇 년이 지나면 누군가가 잊고 싶지 않은 기억만 쏙쏙 골라내서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처럼 책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손끝에 아련함, 떨림 같은 것들이 남아 있었는지 꼭 그맘때마다 <상실의 시대>가 나를 찾았다. 그렇다, 내가 찾은 것이 아니고, 이 책이 나를 찾은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은 내가 읽은 책들 중에 가장 많이 읽은 책이 되었다. 


  <상실의 시대>는 순도 100퍼센트 연애소설이다. 작가가 의도한 대로다. 물론 동시대(60년대 말 70년대 초의 일본)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를 그려내 보고 싶다는 의도 역시 잘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무엇, 정신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마음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심연의 그 무엇이 결국 인간과 시대를 아우른다는 생각에 빠져들게 한다. 와타나베의 사랑이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의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생을 포기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20대 때는 사랑만 보이더니 이제는 상실만 우두커니 남아 나를 맞이해 주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사랑도 결국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감정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기즈키에게, 나오코(와 그의 언니)에게, 나쓰미에게 사랑은 무기력했다. 오직 나(와타나베)만이 미도리와 레이코의 사랑을 통해 실연을, 시대의 우울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희망이라는 작은 불씨는 살려둔 셈이다.


  당장은 어렵겠고 준과 큐가 스무 살이 되면 가장 먼저 <상실의 시대>를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에는 아빠가 들려주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다. 물론 그전에 이미 많은 것들을 경험할지도 모르겠다. 부모 입장에서 어떤 일들은 그렇게 빨기 경험하지 않아도 좋겠지만, 인생과 자식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으니까 일찌감치 포기해야 하는 것들은 포기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 



  표지 그림은 아내가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그린 '사려니 하다'라는 작품이다. 제주에서 한 달 머물 때  온 가족이 함께 걸었던 사려니 숲을 그린 것이다. 이 책에서 나오코가 요양하고 있는 '아미료 요양원'이 위치한 깊고 한적한 숲이 이런 이미지가 아닐까 싶어 표지로 써 보았다. 아내의 그림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지만 나에게는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정답게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들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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