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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an 31. 2020

운수 좋은 날

나만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지금은 스마트 폰에 버스 도착 앱이 있어 버스로 출, 퇴근을 하거나 술 약속이 있어 차를 두고 외출을 할 때 정류장에서 오래 기다리는 일이 많지 않다. 게다가 얼마 전에 안 사실인데 버스 정류장 의자가 한 겨울인데도 따뜻했다. 마치 온돌 장치가 된 구들장 같았다. 누군가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조금씩 (기술적으로는) 좋아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불과 십 수년 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기술이 언제까지 우리 사회와 인간에게 우호적 일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이 편리함이 마음에 들었다.  


  회사가 강남역에 있을 때에는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회사 바로 앞에서 내렸다. 횡단보도만 건너면 회사가 입주해 있는 건물의 출입문이 나왔다. 아직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아침 기분은 얼마나 짧은 시간 동안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느냐와 탑승 형태 (앉아 가는냐, 서서 가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5분 이내로 기다렸다가 앉아서 가는 날이면 회사 일도 이상하게 잘 풀렸다. 상쾌한 기분에 컨디션도 최고였다. 싱글벙글하는 얼굴을 뻔히 쳐다보던 동료는 로또라도 당첨되었느냐고 묻기도 하였다. 작은 일에도 감사할 뿐이라고 동료는 이해하지 못할 멘트를 날리기도 했다. 물론 버스는 언제나 비슷비슷한 시간에 왔다. 하지만 어떤 날은 텅 비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앉을자리는커녕 서 있기도 비좁은 상태로 도착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와 같은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던 일부 사람들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던 직전 정거장까지 걸어가 탑승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도 가끔 중요한 회의나 보고가 있는 날이면 좀 더 일찍 나와 직전 정거장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곤 했다. 


  그러나 정말 나만의 '운수 좋은 날'은 따로 있었다. 바로 퇴근길에 시간에 딱 맞추어 버스를 타게 되는 날이었다. 회사 앞 횡단보도는 약 5분에 한번 꼴로 파란불이 켜졌다. 하루 종일 사람과 일에 치여 녹초가 된 몸을 질질 끌며 회사를 나서는데 마침 바로 파란불이 커진다. 터벅터벅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우리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 줄 1151번 버스가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정차해 있다. 그럼 언제 몸이 피곤했냐는 듯이 아드레날린을 내뿜으며 강남역 마천루 꼭대기까지 내 몸을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소림축구 마지막 장면에서 이층 버스를 타는 무림고수들처럼 몸을 날려 버스에 오른다. 교보생명 4거리에서 회차하는 노선이기 때문에 앉을자리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나만의 운수 좋은 날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 날이면 존재하는지 여전히 스스로에게 물음표인 여러 신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횡단보도에서 파란 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많은 1151번 버스가 눈 앞에서 사라져 갔는지 모른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죽어라고 뛰었는데 그것이 신기루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보다 딱 열 배쯤 더 허망한 순간이다. 그런 시련이 있어 나만의 운수 좋은 날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큐가 발을 다쳐 깁스를 한 탓에 준의 졸업기념으로 제주도로 가기로 했던 가족여행을 취소하였다.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니 수수료가 만만치 않게 나왔다. 선배형이 어렵게 잡아준 숙소도 취소했다. 앞으로 2년 동안 그 숙소를 잡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졸업기념 여행이 취소되어 우울해진 준과 아내를 달래주기 위해 영화를 보고 외식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편의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제주 펠롱에일을 발견했다. 지난여름 제주 한 달 살기 때 맛본 2019년 최고의 맥주였다. 그때는 출시 초기라 제주도 이외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제야 뭍으로 나온 것이었다. 가격도 훨씬 저렴해졌다. 만원에 세 캔이나 구입할 수 있었다. 아내도 나도 너무 좋아하는 맥주라 더 사고 싶었지만 딱 세 캔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았다며 너무 행복해했다. 고작 맥주 세 캔에 이렇게 금방 행복해질 수 있다니!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었다.


  맥주 세 캔이라 일회용 봉투를 구입하지 않고 패딩 주머니에 넣고 왔다. 현관문을 열다가 그중 하나를 떨어뜨렸는데 캔 가운데 구멍이 뚫리며 맥주가 현관에 가득 찼다. 어떤 신발은 빨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흠뻑 젖었다. 하지만 나에게 신발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귀한 제주 펠롱에일 하나가 순식간에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는데 무엇이 보일까. 어쩐지 운이 좋다고 했다. 어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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