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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an 27. 2020

이런 건 닮지 않아도 좋으련만

장난과 그 대가에 대한 큐와 나의 평행이론

  설 연휴 전날 준과 장난을 하던 큐가 발을 다쳤다. 뼈에 금이 간 정도는 아닌 듯했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넘길 만한 수준도 아닌 듯했다. 그냥 봐도 발등은 많이 부어 있었다. 다친 (왼) 발을 제대로 딛고 서지 못하는 데다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준에게 다친 이유를 다그쳐 보았지만 서로 발장난 하다가 책장에 살짝 스쳤을 뿐이라고만 했다. 장난도 정도껏 하라고 버럭 화를 냈다. 나도 모르게 화라는 놈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사내아이들이라 이전에도 심하게 장난치며 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래층에 천사가 살아서 정말 다행이지, 만약 평범한 인간이 살았다면 층간 소음으로 쫓겨나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부디 놀더라도 다치지 않고, 이웃에 피해는 주지 말자고 묵직한 경고를 날리고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보통 명절 연휴가 시작되면 오도 가도 못하고 주차장 같은 고속도로 한 복판에 놓이는 상황이 싫어 새벽같이 길을 떠나곤 했다. 춘천까지 1시간 30분 거리라도 막히면 너댓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설에는 그토록 싫은 귀성길 정체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연휴 기간에도 진료를 하는 병원을 찾아 큐의 발 상태를 확인하고 치료를 하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찾아 간 병원은 이미 환자와 그 보호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365일 하루도 쉬지 않는 응급의학과 전문병원이라 연휴 첫날 아픈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와있었다. 접수를 하고도 앉을자리가 없어 차에 가 있거나 자리를 비운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결국 접수 후 의사 선생님을 뵙기까지 거의 두 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다친 큐의 발 상태가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다. 반깁스를 하고 며칠만 상황을 보다가 통증이 없으면 다시 병원을 찾아오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했다. 늦게 소식을 전해 들은 부모님은 큐가 많이 다쳤으면 이번에는 내려오지 말라고 하셨지만 설 다음 날 아버지 생신 식사자리도 있어 그럴 수는 없었다. 다행히 큐의 발도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으니 늦은 오후에 비로소 고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 화제의 인물은 단연 큐였다. 춘천집에 내려가면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큐가 방구석에 앉아 있는 모습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낯설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놀다 보면 별일 다 생긴다고 아내를 위로(?)하시면서 내 어릴 적 일화들을 소환하셨다. 내리막길에서 냅다 뛰다 넘어져 무릎과 얼굴에 어마어마한 상처가 생긴 일도 있었고 (그때 사진을 보면 코가 루돌프 같다. 상처 때문에), TV (다리와 여닫이 문이 있던 바로 그 흑백 TV) 위에서 공중제비를 하려다 머리부터 떨어져 잠시 기절을 한 일도 있었다. 명절 때 친척들이 많이 와 마땅한 잠자리가 없어 (뚜껑이 있는) 길쭉한 고무다라이에 들어가 잔 적도 있었다. 물론 밤 사이 애가 없어져 아침에 난리가 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때는 정말 어머니께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나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모르는 사실도 있었다. 내 인생 처음 깁스를 한 사건에 대한 진실. 그것 만큼은 어머니께 미쳐 말씀드릴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넷째 누나가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에 오는 시간에 맞춰 누나를 마중 나가는 것이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누나는 겁이 좀 많았고, 우리 집은 가로등도 없는 외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달랑 중1 학생이었지만 넷째 누나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될 수 있었다. 여느 날처럼 누나를 기다리던 나는 누나를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 잔머리를 굴렸다. 마침 큰 덤프트럭이 한 대 주차되어 있었고 그 위로 올라갔다. 누나가 지나갈 때 뒤로 뛰어내려 누나를 놀라게 해 주려는 의도였다. 재미있는 장난을 기다리는 시간은 1분이 1시간 같았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기다림이 저 멀리서 보이는 누나의 모습과 함께 비로소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누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숨죽여 기다리다 마침내 덤프트럭 옆을 지나가는 누나의 뒤로 힘껏 뛰어내렸다.  그리고 비명소리와 함께 데굴데굴 뒹구는 누군가의 그림자.......


  결국 나는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리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리 낮지도 않은 덤프트럭에서 키 작은 중학생 아이가 뛰어내리면 생길 수 있는 정도의 사건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부모님께 다친 이유를 솔직히 말씀드릴 수 있었겠는가. 누나를 마중 나간 착한 동생이 가로등도 없는 길에서 발을 헛디딘 정도로 말을 맞추었다. 내 인생의 첫 깁스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장난 덕분에 나에게로 왔다. (인생은 희극이면서 비극인 것이 두 번째 깁스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는 다음 기회에)


  준과 큐가 말도 안 되는 장난으로 다치는 상황은 결국 모두 내 DNA 탓일지도 모르겠다. 닮지 않아도 될 만한 것들은 참으로 기가 막히게도 닮는다. 이런 것들은 좀 닮지 않아도 좋으련만 이번에도 소름 돋는 큐와의 평행이론이다. 큐가 다리를 다친 덕에 방학 일정도 모두 꼬였다. 아이들 운동도, 가족 여행도 취소되었다. 아내는 어린 시절 서예를 하며 꾸준히 써두었던 忍(참을 인) 자가 머지않아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정말 하루도 바람 잘날 없는 우리 집은 글로 쓰면 소설이요, 필름에 담으면 영화일 것이니 훗날을 도모하며 오늘도 일부를 기록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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