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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Feb 13. 2020

춘천形 아이로 변신!

피는 물보다 진하구나!

  준이 태어나고 막 기어 다닐 무렵 준이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내 서열은 5위밖에 되지 않았다. 


  1위. 외할머니 

  2위. 엄마 

  3위. 외할아버지

  4위. 앨버트 (지금도 잠잘 때 옆에 가지런히 놓고 함께 자는 토끼 인형)

  5위. 아빠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오기 전 잠깐 동안 장인, 장모님과 함께 살았던 덕분에 준의 외할머니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부동의 1위였다. (외할머니의 손자를 향한 사랑은 물론 말할 것도 없지만) 나도 1위 자리만큼은 감히 넘보지 않았다. 그래도 2, 3위 언저리에 있던 내가 5위로 밀려난 것은 일주일 정도의 해외 출장 탓이었다. 출장에 다녀오니 그새 준은 나를 잊었는지 이전처럼 내게 잘 오지 않았다. 퇴근하면 목욕을 시켜주고 분유를 먹인 후에는 트림을 시켜 재워주곤 했는데 불과 일주일 만에 그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 것이다. 조금 섭섭했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최소한 4위로는 올라서겠지 했는데 그것도 호락호락하지 만은 않았다. 아! 내가 토끼 인형과 겨룰 줄이야......


  춘천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준이 태어난 날 산부인과에서 처음 본 후 몇 개월 동안 손자를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준이 6개월쯤 되었을 때 손자가 보고 싶을 부모님을 위해 춘천집을 찾았다. 그런데 춘천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내심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아빠한테도 잘 오지 않는 준이 (준의 입장에서) 처음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는 잘 갈까, 안 가면 부모님이 속상해하시지는 않을까, 혹시 가더라도 (낯을 가려) 울지는 않을까 등등 걱정거리가 태산이었다. 우리 집에 가면서 이렇게 걱정을 한 가득 안고 가기는 처음이었다. 


  춘천 집에 도착하니 준을 보기 위해 누나들과 매형들, 그리고 조카들까지 모두 와 있었다. 보통 명절 때나 볼 수 있는 규모로 온 집안이 떠들썩했다. 이렇게 사람 많은 환경은 처음이라 준이 울지나 않을까 더욱 걱정했는데 이는 나 혼자만의 기우(杞憂)였다. 준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잘 안길뿐더러 고모(부)와 형, 누나들한테까지 잘 갔다. 가끔 살인 미소도 날려주어 모든 사람을 쓰려 뜨리기도 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피는 물보다 진하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사실 큐 때는 더 많은 걱정을 했다. 큐는 준에 비해 낯을 가리는 편이라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가지도 않고, 모르는 사람에게 안기면 잘 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 때와 같이 춘천 집에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식구들에게 잘 안기고 잘 놀았다. 특히 형들을 아주 좋아했다. 그런 큐를 보니 도대체 왜 내가 그런 걱정을 했을까 싶었다. 혈육의 정(情)이란 정말 대단한 것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요즘 아내는 준과 큐가 춘천 집에만 가면 '춘천에 최적화된 인간형'으로 바뀐다고 놀리곤 한다. (물론 행간을 잘 읽어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지만) 집에서는 엄청 깔끔한 준도 춘천에만 가면 잘 씻지 않는 아이로 변한다는 것이 아내의 주장이었다. 사실 아내는 춘천집에 가면 봄, 가을에도 찬 물에 샤워를 한다.(오래된 수도관 탓인지 욕실에만 뜨거운 물이 잘 안나온다) 하지만 준과 큐는 (솔직히 나도 포함) 양치질과 고양이 세수를 하는 것이 전부이니 그런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집에서도 언제나 대충 씻는 큐는 물 만난 고기니 말할 것도 없다. 


  더욱이 집에서는 자발적으로 김치나 매운 음식을 절대 먹지 않는 큐도 춘천에만 가면 할머니의 김치와 매운 두부조림에 밥을 두 공기나 척척 먹는 모습을 보여주어 아내의 주장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특히 큐는 명절에만 먹을 수 있는 꼬치전(일명 꼬지로 쪽파, 게맛살, 햄, 단무지, 마늘쫑을 이쑤시개로 꽂아 만든 전)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며 앉은자리에서 열 개 이상씩 먹는다. 어머니는 예전처럼 설 명절에 일가친척들이 많이 모이지 않아 명절 음식의 양을 줄여나가고 계셨는데 꼬치전만큼은 (큐가 너무 좋아해서) 여전히 많이 준비하신다. 게다가 이번 설에는 슴슴해서 나도 잘 먹지 않는 메밀전에 동그랑땡을 돌돌 싸 먹는 큐를 보면서 나모 모르게 엄지손가락을 척하고 치켜세웠다. 옆에서 잘먹는 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어머니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춘천형 인간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큐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의 소재로도 자주 나오는 쌍둥이 텔레파시 (한 사람이 느낀 고통을 전혀 다른 장소에 있는 사람도 느끼는 것)처럼 혈육 사이에도 어떤 끌림이 있다고 확신한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 스스로도 몇 번이나 경험한 적이 있다. 그런 끌림이 없었다면 준과 큐가 춘천 집에서 보여준 작은 기적들(?)은 설명하기 힘들다. 부디 그런 끌림이 준과 큐 사이에도 하루 빨리 작용했으면 좋겠다. 그럼 매일매일 이렇게 티격태격하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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