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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Nov 14. 2022

인도에서 생긴 일(4)

주언이란 이름의 남자

 저녁을 먹긴 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혼자 편안히 먹고 싶었다. 옥상 레스토랑에서 8시에 보자는 남자의 제안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하루 여행으로 나와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타국에서 만난 모국 사람이 반가워서일까. 남자의 마음은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지금 나의 마음은 혼자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나는 옥상 레스토랑에 가는 대신 몇 블록 건너에 있는 한인식당에 가기로 했다. 


 쉬고 싶다면서 또 한국사람들이 모이는 한인식당에 갈 생각을 하다니. 단순히 김치찌개 정도가 먹고 싶었던 것뿐인데 생각이 짧았다.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열댓 명의 한국사람들이 모여 앉아있는 것을 보고 오늘 선택은 완벽한 실패라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방향을 틀어 다시 나가고 싶었지만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매니저가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분이네요. 혼자 오셨어요?”


 내가 흔하게 생긴 얼굴임에도 처음 뵙는다고 자신하며 말을 거는 것을 보니 빠하르간지에서 오래된 터줏대감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나는 더 이상 사족을 보태지 않고 조용히 식당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열댓 명의 한국인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듯했으나 애써 시선을 외면하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척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젊은 여자 직원이 메뉴판을 갖다 줬고, 잠깐 고민한 끝에 원래 계획했던 김치찌개를 먹기로 했다. 식당 선택은 실패했지만 식사만큼은 성공하고 싶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어... 오늘은 김치찌개가 안돼요. 단체손님들이 오셔서 재료가 다 떨어졌어요. 어쩌죠.”


 저녁 식사시간 치고 너무 늦게 나온 탓이다. 밤 9시면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데, 8시를 조금 넘겨서 왔으니, 이미 한바탕 저녁상이 차려진 뒤였기에 재료가 떨어질 만도 했다.


 “그럼 그냥 제육덮밥 주세요.”


 메뉴 중 가장 무난하고 실패가 없을법한 것을 선택했다. 다행히 제육볶음은 된단다. 음식이 나올 동안 다시 고개를 처박고 애먼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모든 것이 다 귀찮았다. 게다가 김치찌개가 없다니. 기운이 없는 게 당연했다.


 “안녕하세요!”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니 그 남자였다. 남자는 식당 안 사람들과 구면인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레 그들과 합석을 했다. 매니저도 남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김치찌개?”

 “네. 주세요. 아, 너무 배고파.”


 정확히 말했다. 김치찌개라고. 분명 나에겐 재료가 다 떨어졌다고 했는데. 그것도 불과 5분 전에 말이다. 여자 직원은 내 눈치를 힐끔 보더니 매니저 어깨를 툭툭 치며 뭐라 뭐라 말했다. 매니저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둔다. 나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척했지만 온 신경이 김치찌개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그들의 작은 움직임까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왜 나한테 없다고 한 걸까. 뜨내기손님이라서? 아니, 어차피 여행객들은 모두가 뜨내기손님 아닌가. 여기서도 텃새가 존재하는 걸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기차보다 길어질 때쯤 제육덮밥이 나왔다. 


 “저, 이거 저희가 먹으려고 해 놨던 건데 국물 맛이라도 보시라고 조금 가져왔어요. 맛있게 드세요.”


 뒤늦게 주저하며 식탁에 내려놓은 작은 그릇에는 김치찌개가 반쯤 담겨있었다. 그래 이거면 됐다. 약간의 찝찝함과 불쾌함은 완전히 떨쳐지지 않았지만 김치찌개를 내어준 것만으로 만족하며 계속 길어지고 있던 의문의 꼬리를 싹둑 잘라냈다. 이제 먹고 가서 쉬면 되겠다. 오늘 하루 나름 잘 마무리한 셈이지. 스스로 다독이며 밥을 먹었다.


 “오늘은 한식이 당기셨구나. 저는 그것도 모르고 피곤하실까 봐 옥상에서 밥 먹자고 한 거였는데. 맛있게 드세요.”


 어느 틈엔가 남자가 내 옆을 서성이고 있었다. 질긴 고기를 씹다 말고 남자를 올려다보니 약간 멋쩍은 표정이었다. 혹시나 민망할까 봐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맛있게 드시라며 화답했다. 남자는 이내 등을 돌려 한국인 무리에 섞여 앉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이따금씩 그들의 대화 소리가 귀에 들어와 꽂혔다.


 “어이구. 이 오지라퍼야. 여기서 만난다고 다 친구가 아니야. 누나나 되니까 이렇게 받아주는 거지.”

 “얘는 말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면에선 참 오지랖이 넓은 것 같단 말이지.”


남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밥이나 먹어."


남자의 목소리에 나도 다시 저작운동을 이어갔다.


 “우리 내일은 같이 이동할래? 나 빠하르간지에서만 일주일째야. 이제 멀리 가보려고.”

 “그래. 야, 주언아 너도 내일 같이 가자. 사막투어 한 번 해야지.”


 남자의 이름이 주언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하루 내내 함께 여행했지만 그 누구도 먼저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았다. 주언이란 남자가 대답한다.


 “아니. 나는 내일도 여기 있으려고.”


 나도 내일 이곳에 있을 예정이다. 주언이란 남자와 나는 내일 또 같은 공간에 머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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