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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May 05. 2023

인도에서 생긴 일(27)

진짜 혹은 가짜

아람볼 해변 끝으로 가면 야자수로 뒤덮인 야외 로컬음식점을 만날 수 있다. 야자수가 어찌나 울창한지 커다란 잎들이 서로 기대고 얽혀서 파라솔이나 우산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다. 때문에 테이블이 모두 야외에 자리하지만 마치 커다란 실내 정원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이곳의 주 메뉴는 탈리다. 탈리는 우리나라 한정식처럼 한 상차림으로 나오는 인도전통음식이다. 탈리 자체를 음식이라고 한다기보다 큰 접시에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담은 상차림, 또는 그러한 식사방법, 상차림을 올리는 큰 접시를 의미한다. 재미있는 것은 지역마다 탈리에 올리는 음식이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나는 새우탈리를 주문했다. 잠시 후 동그란 쟁반 위에 새우커리를 포함해 밥과 난, 각종반찬과 소스가 한가득 담겨 나왔다. 비록 밥알은 입 안에서 자유분방하게 날아다녔지만 진한 새우 커리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맛도 좋고 기분도 괜찮았고 다 좋았다. 단 하나, 불편한 이 상황 빼고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주언은 말없이 난을 뜯어 커리를 찍어먹고 있었다. 좀 전까지 숙소를 나서기 전에도 박력 있게 밥이나 먹으러 가자던 녀석이 말없이 고개를 박고 커리만 먹고 있다. 정말 배가 고팠던 것일까. 아님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할 말을 잊은 것일까.


“맛있어?”


어색한 기운을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별 의미 없는 식사자리에서의 흔한 질문이지만 이마저도 던지지 않으면 어색해서 목이 멜 것만 같았기에 가까스로 입을 뗐다.


그러나 주언은 말없이 계속 커리만 먹어댔다. 주언이 시킨 것은 치킨커리였는데, 새우커리보다 훨씬 더 맛있는 것일까. 얼마나 맛있기에. 이 집 맛집이네. 상황이 이지경인데 음식이 들어가는 걸 보니.


“진짜 그게 궁금해?”


주언은 계속 고개를 처박고 손으로 난을 찢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대신 질문을 던졌다.


“어? 아니...”


예상외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 나도 고개를 처박고 어색하게 다시 새우커리를 뒤적였다. 주언 역시 치킨커리를 뒤적뒤적하며 한박자 숨을 고른 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변명하듯 설명했다.


“희정이가 말해줬어. 너 아람볼로 간다고.”


예상은 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날 희정에게 이제 난 아람볼로 갈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그녀를 응원했었다. 주언을 보는 순간 희정이 말을 전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우연이 반복될 리 없었다. 그리고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그런데 왜, 대체? 이번엔 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심각할 거 아니잖아. 너도, 나도.”


주언의 말이 맞다. 단지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사이일 뿐, 우리는 서로의 감정에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고, 당연히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두면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 감정에 대한 자신이 없었고, 희정이란 존재를 확인하고 혼자 심각해져 버렸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관계를 회피하여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왜 온 거야? 그것도 혼자.”


많은 말들을 생략하고 제일 궁금했던 질문을 건넸다. 제일 궁금하면서도 너무나 뻔한 질문이었다. 당연히 나를 보러 온 거겠지. 감정이 있으니까. 과연 뭐라고 답할까. 좋아한다고? 보고 싶었다고? 그러나 내 예상은 정확히 빗나갔다.


“그럼 그냥 놔둬? 연락처도 모르는데. 방법이 없잖아.”


주언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말끝에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내가 예민하게 느낀 것은 아닐 거다. 대각선 맞은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인도연인도 주언의 말에 우리를 흘끗거렸으니까.


따가운 시선을 뒤로하고 다시 주언의 답변을 곱씹었다. 생각해 보니 주언의 말 대로 우린 그 흔한 전화번호 교환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는 SNS도 주고받고, 연락처도 알려줬지만 생각해 보니 주언과 영인, 그리고 희정이와는 추후 연락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주고받지 않았었다. 알고 있는 건, 영인과 포털사이트로 쪽지를 주고받았을 때 알게 된  영인의 아이디뿐. 그마저도 서로가 몰랐을 때 주고받은 것이었다.


“그러게. 서로 먼저 물어보질 못했네. 계속 마주쳐서 계속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봐.”


사실이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대부분 이들과 함께였으므로 마치 오랜 친구 같은 편안함과 계속 인연이 이어질 거란 믿음이나 확신 같은 것을 느꼈나 보다. 


“그것보단, 물어볼 수 없었지.”


주언의 생각은 나와 다른 듯했다.


“왜?”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서.”


아니다. 정확히 같은 생각이다. 나 역시 느끼고 걱정했던 부분이었다. 낯선 타국땅이라 느끼는 가짜 설렘인지, 인연을 만나서 진짜 설렌 것인지. 응팔에서 정봉이의 마음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정봉이가 심장의 두근거림이 심장병 때문인지 그녀 때문인지 확인하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을 주언도 비슷하게 느낀 듯 보였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내가 별다른 대답이 없자 주언은 밥 먹는 것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내가 레스토랑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주언은 걸음을 빨리해 점점 나와 멀어져 갔다. 화가 난 것일까. 그의 걸음걸이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왠지 모를 마음의 거리감이 느껴져 선뜻 걸음을 재촉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급기야 주언의 뒷모습조차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뭐야... 어디 갔지.”


뭐 하자는 건지. 순간 울컥했다. 찾아와 놓고 별 얘기도 안 했는데 이렇게 다시 간다고? 설마. 다섯 살 어린아이도 아니고 감정기복이 이렇게 심하다고? 아님 급똥이 찾아온 것은 아닐까. 


나는 다방면으로 이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나 내 상상 속에서 정답은 없었다. 멀리 주언의 모습이 다시 가까워져 오고 있었고 그 안에 답이 있었다. 스쿠터를 빌려온 것이다.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다가오더니 내 앞에 멈춰 서서 핸들 한쪽에 걸어뒀던 초록색 헬멧을 친히 머리에 씌워주기까지 했다.


“원피스랑 깔맞춤으로 가져왔어. 어때, 마음에 들어?”


실없는 농담이지만 웃음이 터졌다. 주언 앞에서 처음으로 박장대소를 하며 웃은 것 같다. 내가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웃자 주언도 피식 미소를 날렸다.


“그만 웃고, 얼른 타.”


주언이 고갯짓을 하며 뒤에 타라고 일렀다. 그러자 이번엔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다섯 살 어린애도 아니고 감정기복이 이렇게 심해도 될 일인가. 영인이 뒤에 타라고 했을 땐 정말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었는데, 주언의 말 한마디에 다리까지 굳어버렸다.


“왜 그래?”


“아, 아니야. 타야지, 그치. 난 운전을 할 줄 모르니까. 뒤에 탈 수밖에.”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변명이라도 하듯 중얼거리며 스쿠터 뒷자리에 올라탔다. 그런데 또 하나의 난관과 부딪혔다. 어디를 잡을 것인가. 의자 뒷부분을 잡아야 할지, 주언의 허리를 잡아야 할지. 그 어디로도 손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꽉 잡아야지.”


그러자 주언이 무심히 내 손을 끌어다 자신의 허리춤에 가져갔다. 못 이기는 척 어정쩡하게 주언의 옷을 부여잡았다. 이내 스쿠터는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주언은 달리는 내내 말이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말없이 한참을 달렸다. 길이 나오면 나오는 대로 길에 몸을 맡겼다. 어디 가냐 묻지도 않았고, 어디 간단 말도 없었다. 바람을 맞으며 주변 경치를 둘러보며 이따금씩 주언의 어깨와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며 스쿠터 드라이브를 즐겼다.


수많은 여행객들이 스쿠터를 타고 해변마을을 달리고 있었다. 우리를 앞질러 가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뒤에서 바라보면 연인인지 아닌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연인들은 허리를 꼭 껴안고 안정적으로 달렸지만, 어느 한 커플은 나와 주언같은 사이었는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불편하게 달리는 모습을 보았다. 


누군가의 눈에도 우리가 어색하고 불편하게 보이겠지. 그래도 괜찮았다. 비록 자세는 불편했지만 마음만은 편안했다. 주언도 같은 생각일까.



“어? 비 온다.”


한참이나 말없이 달리다가 멈추게 된 것은 빗방울이 떨어져서였다. 하늘이 점점 거뭇해져가고 있었기에 부랴부랴 숙소 쪽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비가 쏟아지기 직전에 숙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일단 들어가서 쉬자.”


주언과 나는 스쿠터에서 내리자마자 머리에 손 우산을 만든 채 각자의 방 앞으로 뛰어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서로 아무 말도 않은 채 방 안에서 홀로 휴식을 취했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지만 주언도 나도 누구 하나 방문을 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창문까지 활짝 열어젖혔다. 


잠시 후, 주언의 방 쪽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스피커로 노래를 틀은 모양이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노래였기에 허밍으로 음을 따라 부르며 푸쉬카르에서 샀던 수첩을 꺼내어 펼쳤다. 그리고 그냥 의미 없는 말들을 끄적거렸다.


빗소리는 점차 거세졌고, 창문 틈으로 빗방울이 조금씩 들이쳤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문을 닫을 생각이 없었다. 쏴아아 쏟아지는 빗소리는 노랫소리와 어우러져 더욱 운치 있었다. 부스스 들어오는 빗방울도 시원하고 좋았다. 


주언의 콧노래가 비바람을 타고 내 방까지 들어왔다. 그의 낮은 음성에 맞춰 나도 조용히 음을 보태어본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감정은 잠시 내려두기로. 그냥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그러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비는 한참이나 내렸다. 빗소리와 함께 어느덧 저녁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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