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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May 24. 2023

인도에서 생긴 일(28)

Relax your mind

우리의 저녁은 더없이 즐거웠다. 점점 더 굵어지는 빗줄기 탓에 주언이 미리 알아봤다는 근사한 레스토랑이나 분위기 좋은 펍에 가진 못했지만 각자 배낭 한 구석에 아껴둔 참치캔과 조미김, 골뱅이, 볶음김치 등을 꺼내 푸짐한 한국식 탈리를 차려냈다. 


널찍한 창문틀 위에 각종 통조림을 보기 좋게 배치하고 각자 가지고 다니던 작은 랜턴을 창틀 양옆에 거꾸로 매단 후 방안 불을 끄니 핫한 펍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그럴싸했다. 창문은 여전히 활짝 열어둔 채 그 앞에 의자를 두 개 끌어와 창밖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빗줄기는 계속해서 쏟아져 내렸다. 창문틀에 튕겨져 이따금씩 얼굴을 적시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누구도 창문을 닫을 생각이 없었다. 멋쩍게 손으로 빗물을 쓸어내리며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이런 분위기에 술 한 잔이 빠지면 섭하지. 주언이 자이살메르 사막에서 미처 따지 못했다던 올드몽크도 한 병 꺼냈다. 


올드몽크는 킹피셔 맥주와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주류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럼으로 꼽힐 만큼 유명한 술이다. 럼주의 특성상 도수가 40도 이상을 상회하기 때문에 웬만한 주당이 아닌 이상 스트레이트로 마시면 바로 뻗을 수도 있다. 때문에 대부분은 얼음을 타서 온더락으로 마시거나 콜라를 섞어 럼콕으로 마신다.


주언이 블루투스 스피커 챙겨 와 휴대폰에서 플레이리스트를 고르는 사이 나는 올드몽크와 콜라를 적절한 비율로 컵에 따라 럼콕 두 잔을 만들어냈다.


[I know you heard this line a thousand times. The way you look tonight just blows my mind]


그 순간 스피커에서 보이즈투맨의 ‘Relax your mind’가 흘러나왔다. 


“어? 이거 나도 정말 좋아하는 노랜데.”


“그래? 나도 이 노래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아해.”


오랜만이다. 꽤 오랫동안 내가 제일 자주 듣는 플레이리스트에서 빠지지 않았던 노래다. 그 순간 주언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지금 is 뭔들. 그러자 주언이 더욱 궁금해졌다.


“근데 왜 하필 인도였어?”


문득 그가 왜 인도를 택했는지 알고 싶어졌다.


“희정이가 많이 말해서 궁금하더라고, 도대체 어떤 곳인지. 영인이도 첫 배낭여행은 고생 좀 해보자고 해서.”


주언이와 영인이도 나처럼 이번 인도가 첫 해외여행이라고 했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 가장 궁금했던 곳을 택했다고. 풍문으로 들은 것처럼 정말 못 살 곳인지, 다른 누군가의 말처럼 낭만적인 곳인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떠나왔다고 했다.


“근데, 럼콕 진짜 잘 만들었다. 맛있네?”


주언은 럼콕을 마시며 나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나도 말없이 럼콕을 한 모금 들이켰다. 얼음도 없고 레몬이나 라임도 들어가지 않아 어딘가 밍밍하고 미적지근해서 맛있을 리 없는 럼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동안 마셨던 럼콕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맛있었다.


“그러게. 나 재능 있네. 맛있다.”


우리는 말없이 럼콕만 홀짝였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어느덧 빗소리는 잦아들었다. 밤이 깊었고 시간은 자정을 향해하고 있었다. 


“내일 같이 갈래?


주언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어, 어딜?”


순간 당황한 나는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나저나 다짜고짜 어딜 같이 가자는 것인지. 주언은 별의별 방법으로 나를 자꾸만 놀래 킨다.


“애들한테. 베놀림 해변으로 간다고 했거든.”


영인과 희정을 만나러 같이 가자는 얘기였다. 주언이 나를 찾으러 이곳으로 떠나올 때, 별 말없이 배웅해 주며 다음날 베놀림 해변에서 만나자 말했다고. 지금 그 둘은 어떤 기분일까. 희정은 괜찮은 것일까. 문득 희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글쎄...”


내가 선뜻 대답이 없자 주언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당연히 내가 그를 따라나서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불편해서 그래? 아니면...”


그때였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선 흘러나오던 노래가 별안간 멈췄고, 주언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주언이 로밍을 해왔던가? 아님, 알람 설정 같은 것일까. 궁금증이 머릿속을 스치고 가던 순간 주언이 하던 말을 끊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왜. 어? 어... 왜 인마.”


당연한 듯 편안하고 무심히 전화를 받는 것으로 보아 영인에게서 걸려온 전화인 듯했다.


“뭐, 미친놈아. 그러는 넌 희정이랑 아직도 같이 왜 있는데.”


영인이 아마도 자정이 다된 시간까지 나와 같이 있는 것을 알고 한 소리 한 것 같았다. 주언의 대답만으로도 전화 내용이 투명하게 들려왔다. 영인답다. 


“어, 아직 몰라. 얘기 중이었어. 몰라, 어떻게 될지. 어. 어. 그래. 들어가라.”


이번엔 내일 나와 같이 베놀림 해변으로 올 것인지 물었을 것이다. 내가 확실히 대답을 하지 않았으므로 주언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이 질문은, 아니 이 전화 자체를 희정이가 시킨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언뜻언뜻 참견하는 말을 던지는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래, 초조할 테지. 그러게 왜 내가 아람볼에 간다는 걸 알려줘서는. 


“아, 영인이. 전화 와서.”


주언은 전화를 끊자마자 발신자의 정체를 알렸다. 말해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어쩐지 고마웠고, 내가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응. 근데 너 로밍해 온 거야? 난 나처럼 그냥 맨손으로 온 줄 알았어.”


내 질문에 주언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변명하듯 설명을 이어갔다.


“아니. 이건 내 폰 아니고. 희정이꺼. 나도 너처럼 로밍도 안 하고 유심도 안 샀어. 번거로워서. 또 영인이가 로밍했으니까 굳이 안 했는데. 따로 혼자 떨어져서 아람볼로 간다고 하니까 희정이가 빌려주더라고. 같이 연락은 해야 하니까, 그래서...”


주언은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아니, 왜? 그럴 수도 있지. 게다가 우린 지금 아무 사이도 아닌걸. 아무 사이라고 하더라도 친한 동네친구 휴대폰 좀 빌린 것을 가지고 뭐. 아니지. 그냥 친구는 아니구나. 아무튼 내가 뭐라고 기분 나빠할 상황은 전혀 아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으므로.


“근데 말이야. 주언아.”


“응? 얘기해.”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말을 걸 때도 호칭 없이 대화를 했고, 부르고 싶었던 순간엔 희정이가 곁에 있어 차마 이름을 말하지 못했었다. 처음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약간은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쪽지. 여행 일정표. 그거 왜 준건지 물어봐도 돼?”


그 쪽지를 따라 인도 남부 고아 해변까지 왔지만 직접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저 나와 같은 마음이라 생각했기에.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연락처 대신 인도 여행일정표를 건넨 이유를 말이다. 


나를 시험해 본 것일까. 따라오는지 안 오는지. 그게 궁금해서 장난친 것은 아닐 테지. 희정의 존재에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었나 보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것을 보면. 왠지 긴장이 되어 주언이 대답하기 전에 얼른 럼콕 한잔을 들이켰다.


“너도 휴대폰 로밍 안 한 거 같아 보였고. 나도 그랬고.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갑자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더라고.”


“마땅한 방법?”


“너랑 계속 함께 여행을 할 수 있는 방법 말이야.”


주언은 긴장한 내 마음을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왔다. 이게 만약 드라마나 영화 대사였다면 보는 사람들은 설렐까, 아님 오글거릴까. 


난 설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진정하자. 좀 전에 보이즈투맨 오빠들이 그랬잖아. Relax your mind라고. 


“내일 나도 가지 말까?”


훅 치고 들어온 1차 공격에 정신이 혼미한 틈에 주언의 2차 공격이 들어왔다. 릴랙스고 나발이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렇게 또 날 시험에 들게 하다니. 주언의 2차 공격 역시 너무나 설렜지만 동시에 불안도 밀려왔다. ‘


이게 맞는 걸까.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과의 설렘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럼콕 때문인지 불안 때문인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릴랙~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했다.


주언 역시 내 대답을 기다리며 럼콕을 한 잔 털어 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다시 빈 잔에 올드 몽크를 졸졸 따르며 내 눈치를 힐끗 살폈다. 잠깐이지만 그 사이 어느 정도 릴랙스가 됐다. 이제 대답할 차례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님 내가 널 따라가도 괜찮지만. 우리가 함께 여행하는 건 아람볼에서 끝내는 게 맞는 거 같아. 원래의 여행목적대로.”


내 대답이 조금은 차갑게 느껴졌던 것일까. 주언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며 낮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내 대답은 이게 끝이 아니다.


“대신...”


“응?”


“내일 아침 각자의 갈 길을 가는 대신 말이야.”


“응.”


“오늘 같이 있자.”


이번엔 내가 그의 마음을 훅 치고 들어갔다. 후회 없이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주언에게 느낀 설렘이 가짜일지라도 이 순간에 충실하고 싶었다. 


“어.”


그의 대답은 차분했고 간결했고 확실했다. 밤은 점점 짙어졌다.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지만 처음일지 마지막일지 모를 우리의 시간이 비로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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