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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May 03. 2023

인도에서 생긴 일(26)

내게 오는 길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전날 과음을 한 탓이다. 비몽사몽으로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게 볼일을 본 뒤 어젯밤 미처 지우지 못하고 잠들었던 선크림의 흔적을 지우기 전 거울로 몰골을 확인했다.

퉁퉁 불어 터진 얼굴은 한겨울 호빵보다 더 크게 부풀어있었다. 두 눈은 마치 보리쌀 같았다. 툭 튀어나온 눈두덩에 실선을 그은 것처럼 떠지지 않는 눈구멍. 그럼에도 앞이 보이다니 신기할 정도였다. 엉엉 울면서 술까지 부어라 마셔라 하니 입술이 물에 불린 듯 잔뜩 부풀어 올랐다. 썰면 8천 원어치는 받아야 할 것 같은 비주얼. 가히 가관이었다.

비틀거리며 겨우 세수를 마치고 나와 얼굴이 터질 듯 두 뺨을 찹찹 소리 나게 때리며 로션을 발랐다.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두드려대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붓기는 여전했고 단전에서부터 술 냄새가 풍겨 나왔지만 정신은 그런대로 온전한 상태로 돌아왔다.

“군모니!”

침대에 다시 드러누우려고 몸을 비틀었는데, 문 밖에서 혀 짧은 목소리의 안부인사가 들려왔다. 바닐라였다. 바닐라는 오늘도 어김없이 내 방에 들어와 아침점호를 시작했다.

“바닐라, 잘 잤어? 오늘은 뭐 할 거야?”

그녀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내 질문에 관심이 없는 건지 대답도 잊은 채 연신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마도 몰라보게 달라진 내 외모 때문인 듯했다.

“와우...”

바닐라는 감탄사인지 탄식인지 모를 추임새를 내뱉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하얀 색실을 넣어 땋아 올린 레게머리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머쓱해져 마른세수를 하며 바닐라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어제 이모가 좀 신나게 놀았어. 술도 좀 마시고. 원래 어른들은 혼자 술도 마시고 가끔 울기도 하고 그러는 거거든. 너도 나중에 이모 나이가 되면 이해할 수 있을걸?”

한국말로 했기에 당연히 바닐라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바닐라는 나를 이해하려 애썼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 손 위에 슬며시 통통한 고사리 손을 포개어 얹었다. 술이 덜 깬 건지 그 모습에 또 울컥해 하마터면 주르륵 눈물을 흘릴 뻔했다. 다행히 뜨거운 아침햇살 덕분에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래서 광합성을 해야 하나 보다.

바닐라는 이내 내 품에 쏙 안겼다. 말랑말랑한 바닐라의 품 덕분에 조금은 위안이 되는 기분이었다. 나도 바닐라를 꼬옥 안았다. 그러기도 잠시, 바닐라가 내 품을 빠져나와 코를 잡아맸다. 술 냄새 때문이리라.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정중히 사과한 후 친히 그녀의 방까지 모셔다 드린 후 다시 휴식을 취했다.

쉬는 동안 얼굴에 팩을 얹었다. 아직 여정이 남았으므로 다시 힘을 내야 한다. 그러려면 불어 터진 얼굴부터 되돌려야겠지. 차가운 팩을 얼굴에 얹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난밤 서러웠던 감정들을 다시 꺼내어 곱씹으며 하나씩 차곡차곡 개켜 가지런히 정리했다. 뒤엉켰던 감정들이 어느새 제자리를 찾았고 원래의 평온한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다.


팩을 하는 동안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한결 개운한 정신과 몸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한번 세수를 했다. 술 냄새도 잦아들었고 비틀거리지 않고 걸을 수도 있었다. 몸이 가벼워지자 기분도 상쾌해졌다.

“한 번 입어볼까...”

어제 직원언니의 상술에 얼떨결에 구매한 초록색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스타일과 색상의 옷이지만 왠지 입고 싶어졌다. 지금 아니면 입을 수 없을 것만 같았기에 다급한 마음으로 옷을 입었다. 그리고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봤다.

이마가 훤히 드러나게 묶은 레게머리에 진한 녹색을 띠는 원피스를 입은 내 모습은 마치 농부가 정성 들여 잘 키워낸 배추 같았다. 폭소가 터져 나올 만큼 어색했지만 그렇다고 우스워 보이진 않았다. 나름 마음에 들었단 뜻이다.

새 옷을 입어서인지 몰라도 기분이 한 줌 더 가벼워졌다. 할 일은 없지만 일단 나가보기로. 그래야 무슨 일이든 생기지 않을까.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제 더 이상 심심하게 살지만은 않을 것이다.


초록색 원피스에 하얀색 레게머리를 땋은 내 모습은 암만 봐도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쌩쌩 옆을 지나쳐가는 오토바이 사이드미러로 자꾸 낯선 여인이 스쳐 지나간다. 혼자 피식피식 웃다가 미친 여자로 볼까 봐 이내 입을 앙다물었다가 다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사이 십 수대의 오토바이가 스쳐 지나갔고 그때마다 오토바이 사이드미러로 비치는 내 모습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었다. 가까이 비췄다가 오토바이가 멀어질수록 함께 멀어지는 초록 원피스에 레게머리 그녀는 생각보다 멋졌다.

이 모습을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 아마 이런 나를 마주하게 된다면 분명 누군지 모르고 그냥 스쳐 지나갈 것이다. 우리 엄마라 할지라도.

그렇게 길거리에 세워져 있는 자동차 유리창과 스쳐 지나가는 오토바이 사이드미러에 한참이나 내 모습을 비춰보며 천천히 걸었다. 마치 공주병에 걸린 사람처럼, 혹은 서민세계를 처음 구경 나온 진짜 공주마냥 주위를 탐색하고 스스로를 곱씹었다.

“나름 괜찮은데. 마음에 들어. 짜릿해. 최고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자신감이 차오른 나는 급기야 스스로의 최면에 걸렸다. 마치 얼굴은 알려졌지만 이름은 잘 모르는, 인기가 많진 않지만 마니아층이 두터운 무명 연예인이 된 기분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외적인 변신만으로 인생이 변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코코넛 하나요.”

길거리 과일가게에 멈춰서 코코넛 음료를 하나 사서 길가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낡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 앞으로 무수히 많은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지나갔다. 앞뒤양옆 상점 직원들은 저마다 호객행위를 하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오토바이는 매연을 내뿜으며 잘도 달렸고, 덜덜거리는 자동차도 수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수많은 풍경 중에 익숙한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움이 만들어낸 착각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분명 맞은편에는 주언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점점 나를 향해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그 순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얼른 몸을 돌려 앉았다. 주언이 어찌 아람볼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그 뒤에 누구를 줄줄이 달고 왔는지도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당장은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난밤 감정을 게워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내 심장은 또다시 뛰고 있었다.

등을 돌린 채 숨죽여 주언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등 뒤로 제법 익숙한 향기와 걸음걸이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의 얕게 내쉬며 곁눈질로 그의 동태를 파악했다.

너무 빨리 동태를 살핀 걸까. 곁눈질을 하는 순간 주언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어? 어?? 어???"

그는 점층적으로 놀라며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뭐, 누구라도 어색하지 않은 반응이다. 그러나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의 반응이 아니다. 도망치듯 떠나온 지 이틀 째, 다시 주언과 마주했다는 것이다.

"뭐, 왜. 뭐가."

마음과는 달리 어색하고 딱딱한 추임새로 인사를 대신했다.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갈 뻔했잖아."

"그게 뭐. 왜. 뭐가."

뚝딱이가 따로 없었다. 어쩜 대꾸를 이렇게 멋없게 밖에 하지 못할까. 나는 구제불능이다.

"뭐가 왜야. 너 찾으러 온 건데 또 엇갈릴 뻔했잖아. 휴, 다행이다."

잘못들은 줄 알았다. 나를 찾으러 왔다니. 우리 집에 왜 왔니 놀이를 하는 건 아닐 테고, 나를 왜 갑자기 찾으러 온 것일까. 나는 주언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인지 자세히 캐묻고 싶었다.

"너 숙소 어디야? 앞장서. 일단 짐 좀 내려놓고 얘기하자."

주언은 등 뒤에 짊어진 커다란 배낭을 뒤 돌아 보이며 정신 차릴 틈 없이 나를 재촉했다.

"어? 어. 저쪽이야, 저쪽."

주언이의 채근에 나 역시 무언가에 홀린 듯 내가 머무를 숙소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짐이 너무 무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길을 안내하며 다시 뒤를 힐끗 돌아봤지만 주언의 뒤를 따라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왜? 애들 궁금해?"

본 적 없던 주언의 모습을 연달아 마주하니 약간 어지러웠다. 수다스럽지 않고 적극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주언의 모습은 그것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일단 가자고. 이쪽 맞지?"

굳이 대답하지 않기도 했지만 내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주언은 배낭을 고쳐 메고 빠른 걸음으로 반발자국 앞서 나를 따랐다.

어느덧 우린 숙소 앞에 도착했다. 이제 어쩌나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주언이 먼저 성큼성큼 정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쪽에서 정원을 청소하고 있던 인도인 직원에게로 다가가 뭐라 뭐라 말을 건넸다.

그리고 잠시 후, 주언은 인도인 직원을 따라가더니 숙소 열쇠를 하나 받아 들고는 내 방 맞은편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열쇠를 따고 문을 연 뒤 배낭을 던지듯 밀어 넣었다.


"뭐야...?"

"나도 여기 숙소 잡았다. 일단 대충 씻고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 땀에 쩔어서 오징어 젓갈이 될 지경이야. 이따 만나."

주언은 이번에도 내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눈인사를 건넨 뒤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좀비처럼 초점 없는 눈빛으로 방안에 들어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생각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주언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기에 이리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그때 문득 주언을 처음 만났던 날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빠하르간지 인터넷방에서 느려터진 컴퓨터를 앞에 두고 속사포 욕을 내뱉던 모습, 그게 주언의 첫 모습이었다.

같은 날, 내가 머물고 있던 숙소 방문을 두드리며 다음날 같이 여행하길 제안했던 것도 주언이었다. 그렇게 인도의 두 번째 날을 주언과 보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함께 저녁을 먹자고 쪽지를 건네었던 것도 다름 아닌 그였다. 생각해 보니 인터넷방에서 내가 먼저 말을 건 뒤로 주언은 끊임없이 내게 먼저 다가왔었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 이번에도 주언이 먼저 나를 찾아온 후에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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