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동창, 오늘의 코워커, 내일의 밥친구
여행이란 때론 사람으로 기억된다.
여행을 살다보면 화려한 건물과 휘황찬란한 빛에 지친 나를 발견한다. 혼자라서 좋았던 여행이, 혼자라서 버거워진다. 그럴때면 새로움을 향한 발걸음을 잠시 돌려 사람들에게 향한다. 부다페스트에서 일하느라 삼년간 얼굴을 보지 못한 동기, 한달간 발리에 머문다는 독일에서 온 디지털노마드, 여행지 친구찾기 플랫폼에서 만난 친구의 친구의 친구. 그렇게 한동안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떠밀려가다, 오랜만에 혼자 놓이게 될 때면 묘한 해방감에 또 다시 나아가게 된다.
집과 사무실을 배낭 속에 지고 한국을 떠난 지 석 달이 되던 때, 외로움을 잔뜩 안고 방문한 부다페스트. 나에게 이 곳은 남자사람친구 'Y'로 기억된다.
Y는 고등학생 티를 벗지도 못한 채 어른 흉내를 내던 스무살, 가장 친한 동기 중 하나다. 여자가 몇 되지 않는 공대에서 남자 동기들과 어울리며 Y와는 유독 많이 다투고 붙어 다녔다. ‘내 이상형은 공유야!’란 내 말에 ‘넌 거울도 안보냐?’며 쏘아붙이던 Y. 유난히 나에게만 모진 말을 뱉어내는 그에게 한 번은 밥상머리의 물수건을 냅다 집어던진 적도 있고, 억울함에 붙여 눈물을 쏟은 적도 있다.
성인이 되고 각자의 인생에 바빠 안부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Y를, 그가 일하고 있는 이 곳에 와서 만났다. 조금 이르게 세어버린 그의 은빛 머리가 부다페스트의 조명과 제법 잘 어울려 멋스러웠다. 각자의 일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부다페스트에 대한 크고 작은 정보들을 나누며 십년 전 그 때처럼 조잘댔다.
이제 Y는 더이상 내게 막말을 퍼붓지 않는다. 오히려 이 곳의 선물을 한아름 준비해 전해줄만큼 다정해졌고, 여전히 친구들 앞에선 말괄량이 마냥 말 수 가득한 나와 달리 차분하다. 한국 사람과 말하는 것이 그리웠단다. 조금 지쳐보인달까. 어른이 된 것 같은 그를 보니, 세월의 흐름이 부쩍 와닿아 서글퍼진다.
분주한 지난 여행으로 지쳤던 나를 부다페스트 밤의 빛이 쉬게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나를 쉬게 했다. Y와의 10년간의 우정이 왁자지껄 했던 이 부다페스트의 밤거리로 기억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