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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Jun 16. 2020

벌레들의 비밀 통로

 

 네 식구가 모여 자는 박공지붕 다락방. 지금 이 공간은 풀벌레의 합창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아는 의성어로는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가장 작은 것들이 모여서 빚어내는 거대한 하모니다. 밤이 깊어갈수록 벌레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이 어둠과 고요를 완전히 잠식해버린다. 내 귓속에 벌레가 들어온 건지 내가 벌레 안에 들어와 있는 건지 모호해지는 지경이 된다.



 정목수가 지은 우리 집은 곳곳에 틈이 많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얹은 대들보는 집터에서 베어낸 낙엽송을 사용했다. 2년을 건조했는데도 내 손바닥이 들어갈 정도의 틈이 곳곳에 나 있다. 나무로 지은 집이다 보니 건축에 쓰인 모든 목재가 수축 팽창을 거듭하며 마른땅이 쩍쩍 갈라지듯 터진 것이다. 산이 둥글게 집 주변을 감싸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 틈으로 숲 속의 벌레들이 자꾸만 들어온다. 봄이면 벌들이 날아와 윙윙대며 집안을 돌아다닌다. 창문을 열면 창턱에 벌 사체가 수북하다. 딱정벌레도 봄에 찾아오는 단골손님이다. 팔딱팔딱 귀뚜라미가 뛰어다니는가 하면 크기와 모양도 제각각인 거미와도 종종 마주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집 터줏대감은 ‘그리마’ 다.


 ‘돈벌레’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이 녀석은 가늘고 긴 다리로 사뿐사뿐 잘도 기어 다닌다. 다 자란 그리마의 다리는 모두 서른 개나 된다. 설거지하다가 싱크대 안에서 보기도 하고 세탁실에서 빨래하다가도 마주친다. 집 안 곳곳에 이 녀석들이 포진해있다. 그리마를 보면 집안에 돈이 들어올 징조이고, 이 벌레를 죽이면 돈복이 달아난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그리마가 따뜻하고 습한 환경을 좋아해서 과거에 좀 사는 집에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란다. 결코 호감을 주는 외모가 아니어서 처음 봤을 때는 기겁을 했다. 눈에 띄는 족족 책으로 내리쳐서 압사를 시켰더랬다. 십 년 넘게 같이 살다 보니 이젠 한 식구려니 한다. 바닥에 방치해둔 물건을 집어 들었을 때 서너 마리의 새끼 그리마가 한꺼번에 후드득 떨어져 나와도 이젠 아무렇지 않다. 게다가 바퀴벌레의 알부터 시작해 모기, 파리, 날파리 등 작은 해충들을 모조리 먹어 치우는 기특한 벌레라니 굳이 잡을 필요도 없다. 포털에서 검색하다가 그리마를 ‘걸어 다니는 방역업체’라고 재밌게 표현한 글도 보았다. 집주인의 아량이 넘치다 보니 녀석들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숨어 지내던 그리마들이 사람이 있는데도 대 놓고 활보하고 다니는 거다.    


 겨울이 되면 집게벌레가 출현한다. 수북이 쌓인 낙엽이나 퇴비, 나무껍질과 목재가 쌓인 곳에서 서식한다고 하니 이 모든 게 고루 갖춰진 우리 집 주변은 완전 최적의 환경이다. 겨울이면 동면을 위해 우리 집으로 잠입해 들어온 녀석들과의 동거가 시작된다. 몸 끝에 작은 집게가 달렸는데 물려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집게벌레도 해충을 잡아먹는 녀석들이라니 굳이 쫓아낼 이유가 없다.


 지난여름에는 머리 위에 뭔가가 꿈틀대는 느낌이 들어서 손으로 잡아보니 사마귀였다. 귀뚜라미나 꼽등이, 거미와 사마귀 같은 곤충은 손으로 잡아서 마당으로 돌려보내 준다. 어느 여름날엔 반딧불이가 들어온 적도 있었다. 밖에 있던 곤충이 우리가 문으로 드나들 때 몸에 붙어 오거나 아니면 열린 문틈으로 재빨리 들어오는 거다. 덕분에 반딧불이의 생김과 초록빛이 발광하는 부분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경험을 했다.


 우리 집을 찾은 수많은 생명체 중 제일 잊히지 않는 손님이 있다. 어느 날 거실 바닥에서 파닥거리고 있던 검은 생명체. 웬만한 곤충에도 움찔하지 않는 나였지만 그때는 더럭 겁이 났다. 그건 크기부터 달랐다. 손바닥만 한 것이 날개를 접고 엎드려 있었다. 조심조심 다가갔다. 뱀만 아니면 되니까. 발 없는 긴 파충류를 제일 무서워하니까. 그건 뒷산에 서식하는 한국 토종 박쥐였다. 저온저장고로 쓰기 위해 집 뒤에 토굴을 만들었는데 그곳에서 거꾸로 매달려 있는 박쥐를 본 기억이 있다. 도대체 어디를 통해 들어온 건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이제 웬만큼 크지 않거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낸다거나 특별히 신경 쓰게 하는 벌레가 아니면 그냥 집안에서 함께 산다. 종종 못 보던 벌레와 마주칠 때면, '벌레가 기어가네. 처음 보는 앤 데. 반가워. 너는 어디서 살다가 우리 집으로 들어온 거니? 여긴 완전 다른 세계지. 밖으로 나가는 길은 아니?‘ 하고 벌레와 인사를 나눈다.



 로알드 달의 ‘제임스와 슈퍼 복숭아’는 곤충들을 향한 작가의 기발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고로 부모를 잃은 제임스는 고약한 고모들에게 맡겨져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게 된다. 서로 가장 아름답다고 으스대지만 실상 흉측하게 생긴 두 고모는 어린 제임스를 감금하고 학대까지 하는 못된 어른들. 그러던 어느 날, 제임스는 낯선 할아버지로부터 신비한 빛을 내는 초록 알갱이를 선물 받는데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봉지 안에 있던 수천 개의 알갱이가 땅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러자 한 번도 열매를 맺은 적 없던 나무에서 거대한 슈퍼복숭아가 열리고 그 안으로 들어간 제임스는 자신만큼 커진 곤충들을 만나 흥미진진한 모험을 떠나게 된다. 어두운 복숭아 안을 밝게 비춰주는 반딧불이, 영리하고 지혜로운 메뚜기, 세상에서 가장 질긴 실을 짜내는 거미와 누에 등 곤충 친구들의 도움으로 여러 난관을 헤쳐 나간다. 이 책에 묘사된 곤충들은 매우 사랑스럽다. 반면 제임스를 괴롭히는 두 고모는 혐오스러운 마귀할멈으로 그려진다. 탐욕과 허위로 가득 찬 어른들세계에 맞선 어린이와 곤충들의 유쾌한 전복이다.


 제임스가 만난 할아버지를 나도 만날 수 있다면 난 곤충만큼 작아지는 초록 알갱이를 선물 받고 싶다. 벌레들의 비밀 통로를 파헤쳐 지도로 그려볼 수 있다면 좋겠다. 걷다가 새로운 벌레 친구를 만난다면 또 다른 통로를 발견할 수 있겠지. 여기는 원래 산 밑의 덤불숲이었으니까. 우리 집이 그들의 서식지이자거대한 통로였으니까.


 오늘도 다락방에 누워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  뻐꾸기창 너머로 보이는 둥근 달과 눈이 마주쳤다. 곧 벌레 행성에 들어와 누운 듯한 기분이 된다. 지금 들리는 건 침묵이다. 초록의 신비로 가득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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