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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Jun 04. 2020

당선이 취소되었습니다.

지난 몇 달간 초등학생인 두 딸과 집안에서만 지내며 종일 EBS 라디오를 들었다.

“엄마, 윤고은의 북클럽 할 시간이야.” 정오가 되면 둘째 딸이 알려줄 만큼 나와 딸들은 이 프로그램의 열렬한 애청자가 되었다. 작가들이 나와 글쓰기 팁도 알려주고, 책 소개도 해주고 낭독도 해주니, 말로 글쓰기를 배우고 귀로 책을 읽으며 낭독의 즐거움도 발견하는 여러모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개학이 거듭 연기되던 4월부터 공모전 소식이 흘러나왔다.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라는 주제로 EBS와 브런치가 함께 글을 공모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무심히 흘려들었다. 공모전이라니. 경품 이벤트는 여러 번 도전해봤지만 공모전은 나와 거리가 먼 단어였다.

“나도 작가다 공모전에서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매일 듣다 보니 어느 순간 귀가 솔깃해졌다. 윤고은 디제이의 나긋나긋한 음성이 ‘너도 도전해 봐,’ 하며 자꾸 부추기는 것 같았다. 마침 써 놓은 것 중에 주제와 부합하는 글 한 편이 떠올랐다. 노트북을 열어 참여방법을 살펴봤다.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를 주제로 글을 쓰고 브런치에 발행하면 된단다. 전부터 이 플랫폼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참에 시작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우선 이곳에 첫 글을 발행하고 브런치 작가로 입문했다. 그리고 응모할 두 번째 글을 적은 다음 나도작가다공모전 키워드를 선택하고 발행 버튼을 눌렀다. ‘이게 이토록 설레는 일이구나.’ 저 우주에 작은 씨앗 하나 쏘아 올리는 심정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플랫폼이라 제대로 응모가 된 건지 몇 날 며칠 자꾸 의구심이 들며 결과 발표만을 기다렸다.



공모전에 응모한 글 ‘솔멩이골을 그리다’ https://brunch.co.kr/@hsj511eldb/4 는 2년 전, 내가 사는 마을에서 이웃들과 진행한 그림책 만들기 수업에 관한 이야기이다. 첫 도전이었고, 녹록지 않은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런 만큼 책이 나오고 그림 전시를 겸한 출판기념회를 마쳤을 땐 누구보다 뿌듯했다. 드디어 결과를 발표하는 날, 오후 5시 반쯤 브런치에 연결된 이메일로 당선을 축하드린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메마른 사막에서 단비를 맞는 기분이 이럴까? 몇 달간 집안 살림에만 묶여 지내던 내게 누군가 던져준 깜짝 선물 같았다.   



메일에는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요청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라디어 녹음 일정에 관한 거였다.

'EBS 라디오 방송국에 가서 내 글을 낭독한다고? 와우' 내가 선택한 시간은 오전 11시.

‘그렇담 집에서 6시에 출발하는 거야. 증평에서 버스를 타고 동서울로 가서 지하철을 타고 일산으로 가는 거지. 지하철 말고 버스를 타고 갈까? 아니야. 증평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갈까? 간 김에 파주 출판단지에 들러 친구도 만나자. 인천에 가서 아는 언니가 하는 책방에도 놀러 가야지’

“언니, 그냥 차 갖고 가자. 우리 가서 맛있는 거 사 먹자.”

이웃에 사는 친한 동생한테 함께 놀러 가자 했더니 본인이 차를 운전하고 가겠단다. 

“그래, 좋아 좋아. 렛츠 고! ”

일 년에 한두 번 서울구경을 할까 말까 한 애 딸린 촌년들, 둘 다 아주 신이 났다.    



당선 메일을 받고 며칠 뒤, 라디오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

“녹음 일정 확인했고요, 근데 충북문화재단 사업으로 낸 책에 실은 글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메일에 적힌 마지막 질문은 이랬다. '당선된 글이 브런치북이나 출판사 등에서 기존에 출판된 글이거나, 입상한 적이 없는지 다시 한번 여쭤봅니다.' 이 질문에 난 다음과 같은 답변을 적어 보냈더랬다. ‘충북문화재단 사업으로 20권 독립 출판하였고, 마을 안에서만 소량 판매했습니다.’라고. 그랬다. 그 글은 마을 주민들의 책 만드는 과정을 그림책으로 엮은 내 책에, 에필로그로 실은 글을 수정해서 보낸 거였다.


(문자) 논의를 진행하였으나 출판된 글은 당선작에서 제외됩니다. 2,3차 공모전에 다시 도전해주세요. 안타까운 답변을 드려 죄송합니다.


(문자) 출판사도 아니고 출판 등록도 안 한 책인데. 흠흠 재고의 여지는 없을까요?

입에 물고 있던 막대 사탕을 뺏긴 기분이다. 하지만 비굴하다.


(문자) 지역 안에서 마을 주민과 함께 책 만든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픈 맘이 커서 내심 기대 많이 기뻐했는데, 부탁드려요.

아 진짜 진상이다. 이 문자는 왜 또 보냈을까?


(문자) 네 저희도 내용을 잘 파악하고 논의해봤는데요. 독립출판으로 진행되었더라도 출간된 글이라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ㅠㅠ



촌 아줌마의 서울 여행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문자를 곱씹으며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간과한 진실과 마주했다. 그림책 만들기 수업 진행은 내 첫 도전이었다. 이웃들이 만들어낸 책을 보며 그들의 글과 그림에 박수 쳐주고 무한 격려를 보냈지만, 정작 내 첫 독립출판물에 대해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책 취급을 안 했던 것이다. 더 제작해서 독립서점에 입고할 계획도 있었지만 인쇄되어 나온 책을 보고 포기했다. 글도 그림도 너무 후져 보였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웠다. 그렇게 묻어버린 책이었기에 출판된 글이라는 자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당선 취소 소식은 마치 이렇게 들렸다. '당신은 이미 그 글로 자신의 책을 만들지 않았나요? 그러니 응모해서 다시 책으로 내지 않아도 돼요. 이미 그걸로 충분해요.'


드로잉 수업을 하며 내가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잘 그린 그림에 대한 과도한 기준을 설정하지 마세요.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 고유의 것을 찾으세요. 지금 그리는 그림은 여러분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니 자신감을 가지세요. 그건 언제나 내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야심 차게 계획했던 서울 여행은 물 건너갔지만 나도작가다공모전 덕분에 브런치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그걸로 족하다.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이제는 좀 나를 다독여 주라고, 엄격한 잣대는 그만 걷어 치우라고. 내안의 말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당선 취소가 안겨준 값진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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