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풀 Jun 26. 2020

블루베리 밭에서


산등성이에서 뽀얀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부슬부슬 가는 비가 나리기 시작한다. 지금 한창 동네 아낙들은 이슬 맺힌 보랏빛 열매를 따고 있을 것이다. 하늘은 잔뜩 흐려있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밭에서 열매 따기 딱 좋은 날씨다.


블루베리 키우는 농부들은 마음이 급하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얼른 열매를 수확해서 출하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 이장님네, 웃동네 사는 J네, 이웃 동네 Y언니네가  블루베리 농사를 크게 짓는다. 이맘때만 되면 일꾼을 구해 블루베리를 따고 선별과 포장을 거쳐 택배까지 보내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12시간 풀타임으로 일하는 고정 일꾼을 선호하지만 그런 일꾼을 구하는 게 여의치 않다. 코로나 19로 외국인 노동자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동네 아낙들이 되는 시간에 맞추어 빈 구멍을 메우고 있다. 6시부터 12시까지 반나절만 일하는 팀도 있고, 식구들 밥 차려주고 8시에 합류해 반나절만 일하는 일꾼들도 있다. 12시간 꼬박 일하는 건 대개 할머니들 몫이다.


일꾼의 입장에서 보면 블루베리 수확은 다른 작물에 비해 수월하다. 서서 딸 수 있는 높이여서 허리 굽혀 일하지 않아도 된다. 잘 익었는지 맛보면서 하라는 주인장의 인심 덕에 방금 딴 걸 날름 입속에 털어 넣는 호사도 누릴 수 있다. 두 사람이 짝이 되어 나무 한 그루씩 훑으면서 따기 때문에 수다 떠는 즐거움까지 더해진다.   


블루베리는 몸에 이로운 성분이 가득하다는 슈퍼푸드로 알려지면서 우리 마을에서도 많이 재배하게 된 작물이다. 눈 건강과 노화방지, 피부미용에 좋다는 게 내 마음에 쏙 드는 효능이다. 사실 따지고 들면 야생초 하나에도 좋은 성분들은 가득하다. 우리 집 주변에서 잡초 취급받고 있는 질경이나 개망초 쑥 같은 풀들도 이곳저곳에 좋다는 약초들이다. 하지만 그 많은 작물 중에서도 블루베리만이 가진 월등한 장점이 있다. 병충해에 강해 농약을 거의 치지 않기 때문에 바로 따서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것. 수종에 따라 새콤달콤한 정도가 달라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는 것. 톡톡 따서 입안에 몰아넣고 오물오물 씹을 때의 식감이 좀 좋다는 것. 그냥 먹어도 좋지만 요플레나 잼, 쥬스, 아이스크림, 빵, 스무디 등 다양하게 먹을 수 있다는 점 등. 그래서 요 야무진 열매는 꾸준히 사랑받고 있고 우리 마을 농가의 주 수입원이기도 하다. 내가 도시에 살았더라면 아마 쉽게 사 먹지 못했을 과일이다. 블루베리 농사짓는 마을에 살다 보니 얻어먹을 일이 많다. 동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마을 공부방에 아이들 먹으라고 이 귀한 열매를 척척 내주시니 아이들도 이맘때만 되면 간식으로 실컷 먹는다.



지난 한 주간 긴급호출을 받고 Y언니네 밭에서 반나절 동안 블루베리를 땄다. 밭에 도착해 발목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볼가리 개 모자를 쓰고 양손에 긴 팔 토시를 낀다. 투명한 비닐 박스가 담긴 빨간 플라스틱 상자를 어깨에 메면 준비 완료다. 이제 배당받은 각 고랑으로 들어가 잘 익은 보랏빛 열매를 딴다.


 “점심 드세요.” 


참 먹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주인 언니가 점심시간을 알려온다. 일꾼들이 잠시 손을 놓고 그늘막이 있는 쉼터로 모였다. 아욱 된장국에 가지볶음과 오이지무침, 군침 도는 알타리김치와 콩나물무침, 부추전. 인근 식당에서 배달된 점심상이 차려져 있다. 반나절만 일하는 내게도 점심 먹고 가라고 권하신다. 이웃 아낙과 할머니들과 수다를 떨며 꿀맛 나는 점심을 먹었다. 밥을 먹자마자 할머니 한 분이 약봉지를 뜯어 입안에 털어 넣으신다.   


 “무슨 약 드시는 거예요?”


 “진통제야. 몸땡이가 다 아파. 안 아픈 데가 없어. ”


 “입은 안 아픈가 보네. 밥은 먹는 거 보니.”


옆에 앉은 친구 할머니의 농에 두 분이 크게 웃으신다.



오랜만에 노동을 한 탓인지 집에 오자마자 잠이 들었다. 한잠 자고 일어나 보니 해가 쨍쨍하고 몹시 덮다. 할머니들은 이 땡볕에 아직도 블루베리를 따고 계시겠지. 안 아픈 데가 없는 몸땡이로 날마다 12시간을 블루베리 밭에서 보내는 할머니들. 동네 할매들 모두 육신의 고통을 친구처럼 데리고 산다. 그래도 젊은 아낙들보다 손은 훨씬 빠르고 부지런하시다. 각종 동네 품일은 이분들이 다 하신다.


목이 칼칼하니 열매를 좀 따 먹어 볼까나? 알이 굵고 잘 익은 것 몇 알을 입에 넣고 오물거린다.

 ‘노화여, 천천히 오라. 침침해진 눈도 좀 밝아지고 피부도 예뻐지면 좋겠구나. '

바람과 햇살과 땅이 선사해준 열매다. 대학 다니는 자녀들 먹여 살릴, 농부의 땀과 희망이 들어간 귀한 열매다.



그림일기 중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집 이야기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