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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Jul 05. 2020

텃밭의 외계 생명체

장맛비가 몇 차례 내리고 나자 손가락 만했던 오이가 쑥 자라 어느새 주렁주렁 달렸다. 머리는 짙은 초록이요 밑으로 갈수록 그 색은 점점 옅어지니 길쭉한 오이 몸에 봄과 여름의 숲이 그대로 담겨있다.


텃밭에 오이가 달리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첫 오이는 따자마자 생으로 씹어 먹으며 그 맛을 음미한다. ‘아그작아그작’ 오이를 씹는 동안 싱싱한 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입안에는 초록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옆에서 오이 씹는 소리만 들어도 입에 침이 확 고인다. 연둣빛 수분을 온몸에 품은 채 씹을수록 담백하고 고소한 맛을 풀어내는 열매. 조리하기 귀찮고 입맛도 없어지는 여름철, 우리 집 텃밭에서 애호박과 함께 내가 가장 애정 하는 열매가 바로 오이다.  


오이로 만든 반찬은 입맛을 돋운다. 오이소박이나 오이지무침 하나만 있어도 식은 밥에 뜨신 물 말아 한 그릇 뚝딱 해치운다. 텃밭에서 따 온 오이가 계속 쌓이면 오이지나 장아찌, 피클을 담가 두고 여름 내내 먹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 집 오이밭에 외계 생명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오이를 가장한 고니인가?


넌 대체 누구냐?

오이의 탈을 쓴 독수리?

길 잃은 초록 비둘기인가?


날이 갈수록 기이한 오이가 속속 출현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달팽이처럼 둥글게 몸을 말아버린 녀석도 있었다.


 '너는 목에 넝쿨을 칭칭 감았구나.'


지금 우리 집 오이밭에는 외계 오이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이것은 텃밭 주인이 몹시 게으른 탓이다. 오이는 물을 많이 먹고 자라는 작물.  오이가 달린 상태에서 물이 부족하면 저렇게 구부러져서 자란다. 계속 웃거름을 주며 곧은 열매가 맺힐 때까지 잘 살펴야 하는데 매번 실패다. 텃밭에 심은 모든 작물을 세심히 살필 여유가 아직 내게는 없다. 잘 생긴 오이 먹겠다고 날마다 두 번씩 물을 뿌려대는 것도 물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곧게 자란 오이도 좋지만 우리 집 텃밭에서만 볼 수 있는 이런 오이들이 나는 더 좋다. 굽은 오이, 둥근 오이, 찌그러진 오이. 우리 집 텃밭에는 각기 다른 오이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자라고 있다. 텃밭 주인의 게으름을 흉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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