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기운에 기대어

로제트(Rosette) 식물이 겨울을 나는 법

by 바람풀

호미로 캐낸 냉이 뿌리를 코끝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다.

땅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묵직한 흙내음이 온몸으로 퍼진다.

혈관 속에 봄이 요동치 듯 흐르기 시작한다.

냉이가 자극한 후각은 지구의 시원(始原)까지 나를 데리고 간다.

태초의 흙내음이 이랬을까?


꽃향이 코로 맡는 종류라면 냉이향은 피부로 맡는 종류다.
꽃향이 뇌에서 작동하는 감각이라면 냉이향은 몸에서 작동한다.
꽃향이 가볍게 공중을 떠돈다면 냉이향은 무게를 지녀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
냉이향은 대지의 비밀스런 뜻이고 본질이다.


김서령만큼 냉이향을 절묘하게 표현한 이를 나는 알지 못한다.

마당에서 한 움큼 캔 냉이를 흐르는 물에 씻어 냉큼 된장국을 끓인다.

갓 지은 밥에 냉이향 가득한 된장국을 마시며 난 새 봄을 시작한다.

한 해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른 봄마다 행하는 나만의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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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지 / 개망초 /꽃다지/ 봄맞이/꽃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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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배암차즈기(곰보배추)/ 지칭개


언 땅이 녹기 시작할 무렵이면 난 호미 한 자루 들고 텃밭이 있는 마당을 어슬렁댄다.

냉이를 캐다 말고 그 옆에 핀 꽃다지를 어여쁜 반지인 양 손가락에 올려도 보고

이건 개망초. 재는 지칭개. 얘는 달맞이. 잎을 구별해 가며 가만가만 이름을 불러본다.

이 또한 봄마다 행하는 나만의 놀이다.


KakaoTalk_20250408_104745840_02.jpg 달맞이꽃 ⓒ 바람풀


납작 엎드린 풀들 중 내 시선을 사로잡은 아이는 바로 이 달맞이다.

여름에 노란 꽃이 피는 바로 그 달맞이꽃.

신부의 부케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잎 자체만으로도 화려하다.

겹겹의 잎마다 노을을 품은 오묘한 빛깔은 또 어떤가?


KakaoTalk_20250408_113253260.jpg 로제트(Rosette) 식물들 ⓒ 바람풀



꽃다지도 냉이도 달맞이도 그 자체로 어여쁜 한 송이 꽃 같다.

마치 꽃잎이 여러 겹 포개진 장미처럼.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로제트(Rosette) 식물이다.

여러 겹의 잎이 빛을 최대한 골고루 나눠 받기 위해 겹겹이 포개진 모양으로 배열되는데

그 모습이 장미(Rose)를 닮았대서 붙여진 이름이다.

겹겹이 포개져 돌려난 잎은 땅에 바싹 붙어 차가운 바람을 적게 맞고

밑에서 올라오는 지열로 뿌리가 마르는 것과 뿌리 주변의 흙이 어는 것도 막을 수 있다.

꺾일 줄기가 없기 때문에 동물들에게 밟혀도 상처를 입지 않고

동물들의 눈에도 잘 띄지 않아 쉽게 뜯어먹히지도 않는다.

미리 싹을 틔우고 잎을 만들어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이듬해 봄 다른 식물들보다 일찍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유리하다.

이 작은 풀들이 겨울 추위를 버티기 위해 진화한 형태가 정원꽃의 대명사로 불리는 장미라니...

정원에 심고 가꾸는 화려한 꽃들보다 언 땅에서 겨울을 견딘 로제트 식물들을 나는 훨씬 더 애정한다.


저 작고 여린 풀들이 겨우내 품었을 대지의 기운은 우주와도 맞짱을 뜰 수 있으리라.

뿌리에 응축된 태양과 바람과 땅의 정기를 내 몸과 나누는 건 마땅하고 옳은 일.

냉잇국도 먹고 살짝 데쳐 무침도 해 먹고 냉이 튀김도 해 먹는다.

그것만으로도 올해 살 기운을 다 얻은 기분이다.






인용글 출처: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김서령/푸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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