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는 영화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이탈리아에 머물며 친구에게 슬픔에 잠긴 사람을 위로할 때 사용하는 표현을 알려준다.
“ I've been there.”
이탈리아 친구가 “어딜 가봐요?” 묻는다.
왜 이 문장이 위로되는지를 묻는 것이다.
주인공은 이렇게 답한다.
“ 깊은 슬픔은 시간의 지도 위에 있는 하나의 좌표이자 특별한 장소가 되거든요. 슬픔의 숲에 서 있으면 도저히 그곳을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아요. 그럴 때 누군가가 자기도 거기 가봤고, 이제는 빠져나왔다고 말해주면 희망이 생기는 법이에요.”
특별한 슬픔을 경험한 사람끼리는 그저 함께하는 것만으로 서로를 위로하는 특별한 방식이 있다는 것을 여운으로 남겨 준 영화였다.
몇 년 전 친한 친구에게 육종암이 찾아왔다. 곳곳의 종양이 있는 살점과 고관절을 드러내는 대수술을 했다. 하지만 몇 개월 만에 육종암이 재발하였다. 걷거나 앉을 수 없을 만큼 재발이 되어 온종일 누워 투병 했다. 친구를 지켜보면서 내적 갈등이 산처럼 쌓여갔다. 회복 되지 않는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를 고민했다.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아 답답했다. 그러던 중 한비야의 조언이 울림이 되었다.
한비야가 구호팀장으로 세계를 누비며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한비야는 극심한 영양실조의 아이들을 구조했다. 질병으로 죽어가던 아이들이 구호 활동을 통해 살아나는 모습들을 보았다. 그런데 모든 상황이 항상 그런 것이 아니었다. 6개월 된 아기가 이동 진료소로 이동하던 중 죽었다. 영양 급식 치료를 받으러 엄마가 업고 온 아이도 죽어있었다.
소말리아의 핑크 보이들도 가성콜레라에 걸려 자신을 만난 지 며칠 만에 죽고 말았다.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현장에서 만난 엄마를 잃은 아이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한비야는 왜 하나님이 이렇게 아이들을 살려주지 않고 가혹하신지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졌다.
어느 날 아이를 잃은 남부 수단의 엄마가 괴로워하는 한비야를 위로했다.
“나의 이 슬픔을 함께하라고 주님이 당신들을 보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한비야는 누군가에게 소리치며 원망해도 모자랄 사람이 도리어 자신을 위로해 주는 아이의 엄마를 보며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슬픔을 당한 이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그 엄마를 통하여 가르쳐 주셨다고, 구호팀장으로서 소명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한비야의 구호 활동을 통해 누군가는 살아났다. 하지만 누군가는 죽어가기도 했다. 한비야는 ‘모두를 살려주는 건 정말 안 되는 일이었을까?’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서 그걸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음을 깨달았다. 구호 요원으로서 자신이 알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자신이 사람의 고통을 치유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비야는 자신의 깊은 깨달음을 이렇게 고백한다.
“하느님은 사람의 고통을 치유하라고 우리를 보내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그런 엄청난 고통을 치유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다만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함께 두려워하고
아파하는 것을 함께 아파할 수 있을 뿐이다.
가끔은 고통과 원망과 회의 앞에서 흔들릴지라도 그렇게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한비야, 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는 구호 활동을 하면서 고통과 원망과 회의 앞에서 흔들렸다. 고통받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과 함께 두려워하고, 아파하는 것을 함께 아파할 수 있을 뿐 자신이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한비야가 느꼈던 고통과 회의감이 내 안에도 가득했기에 한비야의 깨달음이 시원한 답이 되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주체가 아니다. 우리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그저 우리는 고통을 함께 공감하며 아파하고, 즐거워하는 이들과 함께 즐거움을 공유할 뿐이다. 친구의 병을 고쳐주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통받는 친구가 두려워하는 것을 함께 두려워하고, 아파하는 것을 함께 아파하는 것뿐이었다. 친구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추억으로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최선임을 깨달았다.
나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주말마다 친구 집에 방문했다. 친구와 말벗이 되어주었다. 온몸에 통증이 지나다닌다는 친구의 팔다리를 마사지해 주었다. 마지막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친구들과 후배들과 함께 모여 친구의 생일축하를 해주었다. 일주일 후 친구는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떠나갔다. 30대라는 젊은 청춘이었다. 어린 아들 둘의 엄마였기에 친구의 떠나감이 슬프고 안타까웠다. 친구가 떠나기 전 함께 했던 시간은 소중하고 따뜻한 시간으로 저장되어 있다.
만약 한비야의 조언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친구와 함께할 시간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지혜로운 깨달음 덕분에 얼마 남지 않은 친구의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축복을 누렸다. 꽃 잔디가 피어나는 봄이 되면 떠나간 친구가 늘 그리워진다. 위로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많은 가르침을 안겨 준 친구가 무척 보고 싶다.
친구가 떠나간 뒤 한비야의 글귀를 닮은 성경 구절을 삶의 지침으로 삼는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십시오.’(로마서 12:15)
우리는 고통을 당한 자의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없다.
슬픔을 당한 자의 슬픔도 해결해 줄 수 없다.
우리는 그저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슬픔을 당한 자와 함께
그 자리에 함께 머물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