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걸려 넘어진 그 자리가 전환점이다
스물일곱 인생의 봄을 맞이해 결혼을 했다.
성격적으로 개방성이 높은 나는 결혼 후에도 늘 전진해야 했다. 새로운 학업과 배움을 통해서 성장하지 않으면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혼 후에도 대학원에 입학해 학업을 계속 이어갔다.
남편과 내가 원했던 타이밍에 계획 임신이 순탄히 되었다. 태어날 아이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동안 10개월이 지나 건강한 첫아들이 태어났다. 기쁨은 잠시였고, 학업과 일도 모두 정지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견디기 힘들었다.
아들이 4살이 되더니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서 자신도 동생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들은 식사 때마다 예쁜 여자 동생을 보내 달라고 기도했다. 아들의 순수한 기도 때문이었을까?
두 번째 임신이 되었다.
8주가 되어 산부인과에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다. 초음파에서 아기의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의사는 1주일 뒤에 다시 한번 초음파를 해보자고 했다. 1주일이 지난 후 다시 초음파를 했으나 여전히 아기의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의사는 아기의 심장이 뛰지 않으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시간이 늦은 오후이니 다음날 수술 시간을 예약하고 돌아가라고 했다. 아기의 심장 소리를 기대 하고 갔던 나와 남편은 돌아오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내가 9주 동안이나 품고 있는 생명이 멈춘 호흡으로 내 안에 머물고 있다니. 내일이면 죽어있는 생명을 수술로 꺼내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큰 충격이었다.
나를 더 잠 못 들게 한 것은 수술대에 올라가야 한다는 두려움이었다. 어려서부터 주사 맞는 것도 너무 두려워 도망 다녔던 나는 수술대에 올라가 수술을 하는 상상이 극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밀려왔다. 품고 있는 아기가 심장이 뛰지 않는 것보다 다음날 수술대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 더 두려웠던 나는, 불량 엄마였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거렸다. 그 두려움이 내 심장을 밤새 쿵쾅거리게 했다. 그 요동치는 쿵쾅거림이 심장 뛰지 않는 아기에게도 전달이 되었나 보다. 새벽에 화장실을 가려고 몇 걸음 걸어가는 순간 무언가가 순식간에 흘러내리는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달걀만 한 작은 아기집이 자연 유산되어 흘러나온 것이었다.
작은 생명으로 9주 동안 나의 자궁에 머물고 있었던 아기였다. 수술대에 오를 걱정으로 밤잠 이루지 못하는 불량 엄마를 위해 자신을 버려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 먼저 갈게! 안녕!’하며 떠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순간 미안함과 슬픔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새벽 내내 나는 기나긴 울음을 멈추지 않는 통곡으로 토해냈다.
나에게 보내주신 생명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죄책감이 몰려왔다. 작은 생명 하나를 온전하게 품어 주지 못하는 불량 엄마여서 미안했다. 심장이 뛰지 않는 아기보다 나 자신을 걱정하느라 두려웠던 미안함과 죄책감이 가득해졌다.
9주 만에 유산을 했던 사건은 오랫동안 슬픔의 샘이 되었다.
어항 속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
이 재무《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시인의 고백처럼 어항 속 물을 물로 씻어 내듯 슬픔을 닦아내는 시간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가 되어 주었다. 유산의 슬픔을 통해 깨달은 생명에 대한 깊은 지혜를 경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첫아이를 계획한 대로 출산하여 생명의 소중함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유산이라는 슬픔을 통하여 나에게 온 새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생명을 잉태한 이후 생명에 집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생명이 찾아왔어도 출산하지 못했던 슬픔의 사건을 통해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주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느끼게 되었다. 육아가 족쇄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던 마음이 유산의 슬픔을 통해 말끔하게 정리되고 청소되었다.
내 생애 가장 긴 울음을 토해내게 한 유산의 슬픔은 빛나는 보석이 되었다. 슬픔은 내 삶의 중요한 우선순위를 점검하게 했다. 엄마로서 생명의 가치를 가장 우선순위에 놓을 수 있는 헤아림과 지혜를 안겨 주었다.
때때로 우리는 슬픔에 무릎 꿇는다. 슬픔은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잠시 고개를 조아려 내 슬픔을, 내 감정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될 수만 있다면 슬픔은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다. 슬픔을 통해 삶의 진수를 깨닫게 되고, 귀한 보석 같은 지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서처럼 슬픔도 삶을 위한 전환점이 된다.
슬픔의 힘에는 경이로움이 있다.
슬픔만이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상실 수업》
슬픔은 언제든지 우리 삶 가운데 찾아올 수 있다.
슬픔에는 경이로움이 있고, 상실로 고통받는 영혼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슬픔과 애도의 힘은 우리를 치료하는 메시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