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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사라 Aug 03. 2021

잠그지 않는 한, 반드시 찾아온다

사랑, 할 수 있을까

청소년 시절 서정윤 시인의 ‘사랑한다는 것으로’라는 시를 사랑에 대한 정의로 삼았다. 


내가 정의했던 사랑이란 새를 가두고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새가 쉬고 날아갈 힘을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었다. 성장 과정에 정서 탱크가 전혀 채워지지 않았던 나는 온몸에 가시가 가득한 고슴도치였다. 20년 동안 함께 살았던 아버지는 세상에 나를 태어나도록 해주신 고마운 분이셨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은 온통 슬픈 풍경들이다.      


아버지는 늘 해가 질 무렵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걸어오시는 흔들리는 인생이었다. 풀려있던 아버지의 흐린 눈동자, 아버지가 머무는 곳에 가득했던 술 냄새, 집에 들어오시면 시작되었던 아버지의 거친 언어와 술주정과 난동들, 소소한 것에서 시작되어 과격해지는 부부싸움, 아버지 밥상에 늘 놓여 있던 술병들. 25년이 지났으나 그 시절을 회상하면 눈물이 차오른다. 엄마는 일하는 엄마라 늘 바쁘고 피곤하셨다. 할머니께서 엄마를 대신해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주시고, 집안 살림을 도와주셨다. 할머니의 애정으로 숨 쉬고 성장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마주하는 세상은 부모이다. 온 세상이었던 부모님은 사랑과 온정을 제대로 표현해 주지 못해 정서 탱크가 채워지지 않아 가시가 가득한 고슴도치가 되어갔다. 부모님에게 채우지 못한 정서적 결핍은 거절감과 버림받음을 느껴졌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이니 누구도 나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 고슴도치가 되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면 가시를 곤두세웠다. 혼자 높은 담을 쌓았다. 관심을 보이거나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가시로 찔러대고 거부했다. 이 세상의 누구도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생각의 성벽이 너무 견고했기 때문이다.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많은 나를 누가 사랑할 수 있을까?’

아버지처럼 알코올 중독자를 남편으로 만나면 어떻게 할까?’

결혼해 자녀를 낳으면 사랑을 줄 수 있을까?’      

고슴도치의 끝없는 고민이 쌓여갔다. 고슴도치의 고민은 점점 지리산 천왕봉만큼이나 높아졌다. 경험하고 살아온 과거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고, 예측할 수밖에 없었다. 불행한 결혼생활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컸던 내가, 어느덧 결혼생활 19년 차가 되어 간다.      



고슴도치를 한없이 사랑해 주는 남편을 만나 화창한 햇살에 안개가 걷히듯 가시가 사라졌다. 심각한 애정결핍이고, 상처투성이였던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남편을 만나 불행한 과거와 다르게 현재는 행복으로 리모델링되었다.      


남편을 만나기 전 10년 전부터 배우자를 위해 기도해 왔다. 결핍이 많으며 가시가 많은 고슴도치였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배우자의 조건들을 다이어리에 적어가며 10년 동안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저축했다. 배우자 기도제목 중 1,2,3 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마음의 그릇이 바다 정도는 되는 사람

둘째가정에서 특별한 사랑을 듬뿍 받아 정서 탱크가 가득 채워진 사람

셋째가장 소통이 잘 되고 가장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어줄 사람.      


배우자를 위한 기도 제목은 키나 외모의 조건이 아니었다. 학벌이나 직업이 아니었다. 나의 부족한 됨됨이를 알면서도 사랑해 줄 수 있는 넉넉한 사랑의 탱크가 준비된 사람이 필요했다. 서로 대화로 가장 소통이 잘 되는 배우자이기를 소망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했던 배우자 기도가 10년이 채워진 스물일곱,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바다를 바라보며 성장하였다.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며 성장하느냐에 따라 마음의 그릇이 달라진다. 남편은 살아갈수록 남해 바다처럼 마음의 그릇이 거대한 사람임을 느낀다. 남편은 딸 바보 아버지가 딸을 향해 절절한 사랑을 베풀어 주듯 고슴도치 아내에게 사랑을 베풀어 준다. 배우자를 위해 10년 동안 기도했던 첫 번째 기도 제목이 남해 사나이를 만나 응답되었다.     

 

남편은 4남매의 늦둥이라서, 막내라서, 공부를 잘해서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편애에 가까운 사랑을 독차지했다. 남편의 어린 시절, 밥상을 자주 던지셨던 시아버지의 고약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한 번도 아버지에게 체벌을 받지 않았다. 남해 섬에서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었지만 정서 탱크만큼은 넘치도록 가득 채워져 성장했다. 두 번째 기도제목도 완벽하게 응답되었다.       


남편과는 처음 만난 날부터 대화가 잘 통했다. 데이트 시간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이어갔다. 시간이 부족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때는 이메일을 통해 긴 글로 서로의 마음을 소통했다. 만남이 쌓여갈수록 서로의 비밀스러운 아픔과 상처들을 풀어내었다. 남편은 자신의 가정에 아픔과 상처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나도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아버지 스토리를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남편에게 나는 애정 결핍이 심하고, 상처가 많아 결혼은 자신이 없다고 고백했다. 서로 진솔한 소통을 통해 각자의 아픔과 상처들이 공유되고 수용되었다. 남편은 결핍과 상처가 많은 나를 더 소중히 여겨주려고 했다.   

   

연애 시절의 대화와 소통은 결혼 후 19년차인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유지되고 있다. 남편은 가장 가까운 절친이다. 고민이 있을 때마다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는 멘토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상담가이며, 친구가 되어 준다. 세 번째 기도 제목도 이루어 진 것이다.     


 

우리는 지나온 과거의 경험으로 미래를 판단하고, 예측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다. 과거가 결핍이었기 때문에 미래에도 결핍이 될 것이라는 선입견을 과감히 우리의 생각 주머니에서 골라서 내버려야 한다. 


결혼 전 나의 부족함과 결핍, 현재의 모습을 진단하고, 부족함을 보완할 수 있는 짝꿍을 만나기 위한 지혜로운 준비가 필요했다. 과거는 참담했으나 현재와 미래는 빛나는 기쁨과 잔잔한 행복이 가득하다. 처참한 과거를 지닌 고슴도치에게도 행복한 미래는 찾아온다. 


사랑의 빗장을 걸어 잠그지 않는 한 사랑은 반드시 찾아온다.’ 

닉 부이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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