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송년회에서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라 기대가 컸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 마음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그 친구들이 변한 걸까, 내가 변한 걸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사실 이런 감정을 느낀 게 처음은 아니다. 최근 몇 년간 많은 관계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예전에는 분명 힘을 얻고 즐거웠던 사람들인데, 지금은 만나고 나면 오히려 에너지가 빠지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지금의 나는 어떤 관계 속에서 힘을 얻고 즐거울까? 나를 위한 관계의 설정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꽤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굉장히 외향적인 사람이었다. MBTI로 말하긴 웃기지만, E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모임이라면 빠지지 않았고, 술자리도 좋아했다. 연말연초가 되면 송년회와 신년회로 일정이 가득 찼다.
그런데 바쁘게 커리어를 쌓고, 창업을 하고, 나이가 들고, 가정이 생기면서 달라졌다. 술도 거의 끊다시피 했고,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기회 자체가 줄어들었다. 일 외의 인간관계가 확연히 줄었다. 예전에는 친구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나 시간들이 굉장히 많았다면, 이제는 그럴 수 있는 기회나 시간들이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변화는 내면에서 일어났다. 예전에는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과의 시간이 무조건 즐거웠다. 같이 술 마시고, 썰 풀고, 놀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원초적인 재미가 나에겐 즐거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거기다, 오래 알았다는 이유만으로는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게 됐다.
반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함께 고군분투하는 창업자들, 격주 일요일마다 모이는 글쓰기 모임 사람들, AC2 프로그램에서 만난 분들과 대화할 때면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얻은 것처럼 천진난만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할 얘기가 너무 많고,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이런 관계가 나한테 더 있으면 좋겠다, 이런 시간을 사람들과 더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어떤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는가? 결론은 명확했다.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다. 내가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면 상대방도 나에게 물어본다. 내 의견을 말하면 상대방도 자신의 의견을 나눈다. 서로 존중하면서 대화가 오간다. 그런 관계에서 나는 에너지를 얻는다.
반대로 에너지가 빠지는 관계도 있다. 대화의 80%를 혼자 차지하는 사람, 계속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과 있으면 지친다. 공감도 안 되고, 내 이야기를 할 틈도 없다. 솔직히 그 사람의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다 듣고 싶지 않은데, 계속 듣고 있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게 된다.
그리고 그런 대화들이 내가 아주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더 에너지가 많이 빠진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본인만의 고집이나 틀 안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내가 하는 이야기랑 뭔가 다르다고 느끼면서도 존중하지 않는다거나, 본인을 계속 드러내고 싶다거나 자랑하고 싶다거나 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에너지가 빠진다.
또 하나 중요한 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이다. 나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사람과의 관계는 좋다. 예전부터 나는 성장하려고 하고, 뭔가 안 되고 있으면 해결책을 찾고, 회사 안에서도 부족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많은 걸 배우고 도움을 구하려고 시도했었다. 그때 나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내가 그 문제를 분명히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는 훨씬 더 많은 걸 배웠고,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찾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반면 나를 평가하고, 지적하고, 가르치려 드는 사람과는 불편하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나를 아끼는 마음에서 그러는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방식이 맞지 않는다. "너는 똑똑한데 고집이 있으니까 훌륭한 참모가 있어야 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당연히 나를 위한 말이고 좋은 얘기지만, 정말 이 말이 맞을까? 내가 고집이 있다고 느낀 부분은 무엇이고, 그럼 참모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이런 것부터 정의 해나가야 하는데, 사실 상대방은 이런 대화를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너는 이런 사람이야, 너는 이게 필요해"라고 대충 보고 진단 내리는 건 내 입장에서는 무례하게 느껴진다. 그 사람이 나를 제대로 알기나 할까? 대부분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과 있을 땐 그냥 "아 네네, 감사합니다" 하고 말을 안 하게 된다. 그 사람과의 자리를 그 이후로는 잘 안 만들게 된다.
지금의 나는 40대를 바라보고 있지만 여전히 성장에 관심이 많다. 현재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관계가 좋다. 나도 내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그걸 같이 고민하고, 상대방이 어떤 걸 극복했는지, 요즘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지 듣는 게 즐겁다.
그냥 "요새 어때?"라고 물으면 진짜 솔직하게 "요새 이런 게 힘들어, 이런 고민이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데"라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는 사람. 그런 관계에서 나는 진짜 편안함을 느낀다.
내가 뭔가를 노력하고 성취하려는 사람이다 보니, 다른 사람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좋다. 현재나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계속 찾고 노력하고 실행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있을 때 나도 더 나다워진다. 내 모습을 더 드러내게 되고, 자극도 받고, 즐거움을 얻는다.
예를 들면 일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이는 글쓰기 모임이 있다. 거기엔 창업을 해서 지금 열심히 하고 계신 분과, 스타트업에 합류해서 성장시키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있다. 고민이나 공감대가 많이 형성되고, 각자의 상황들도 비슷하다 보니 내 이야기를 하는 게 더 거리낌 없다. 그런 대화를 하면서 나도 많은 자극을 받고 즐거움도 얻는다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을 같이 보냈는지, 같은 제주도 출신인지, 나이가 비슷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서로에게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는가이다. 예전에는 같이 술 마시고 놀고 하는 게 재미있었다면, 지금은 그렇게 학창 시절에 같이 보내지 않았더라도, 세대의 차이가 나더라도, 성장에 관심이 있고 지금 현재 어려움을 솔직하게 공유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더 즐겁다.
그래서 스스로 현재나 과거에 안주하기보다는 미래를 계속 찾고 노력하고 실행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도 더 나다워지고, 자극도 받고 즐거움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고 성장하면서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에서 어려운 건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분명히 그 사람들과 너무 좋은 관계였고, 에너지를 얻거나 즐거움을 얻거나 편안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변화하기 때문에 그 관계 속에서 더 이상은 에너지를 얻거나 충분히 좋은 느낌을 갖지 못하는 경우들이 생긴다.
근데 그 과정에서 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게 습관처럼 하게 되는 게 있는 것 같다. 오래된 친구니까, 정이 있으니까, 딱 갑자기 안 만나자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니까.
하지만 이제는 선택하고 싶다. 과거의 관계에서도, 앞으로 만들어갈 관계에서도. 어떤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지, 어떤 모임이 나와 맞는지,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싶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고 싶다. 하루하루, 단 몇 시간이라도 나답게 살고 싶다. 그래야 후회가 없다.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관계를 유지하거나,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해서 내 주변 관계들을 정의하고 만나는 것이 나답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계에서는 나도 최선을 다하고, 상대방도 그걸 느낀다.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고, 진심으로 즐겁다. 그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믿는다.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는 것들이 있다. 만남 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려고 한다. 이 시간이 나에게 에너지를 줬는가, 빼앗았는가? 솔직하게 답하고 기록해둔다.
그리고 에너지를 주는 사람들과의 시간을 의식적으로 늘리려고 한다. 창업자 모임이든, 글쓰기 모임이든,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난다. 그런 모임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더 찾으려고 한다.
반면 불편한 관계는 억지로 유지하지 않으려 한다. 오래된 친구라도, 지금 서로에게 좋지 않다면 거리를 둔다. 미안해할 필요 없다.
다만 가족이나 정말 중요한 관계라면 조금 다르게 접근하려고 한다. 내가 충분히 애정이 있다면 그 관계가 더 좋아지도록 노력해본다. 내가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정말 그게 안 된다면 그때는 포기하거나 떠나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또 새로운 관계를 찾고 기회를 찾는다.
관계는 변한다. 나도 변하고, 상대방도 변한다. 예전에 좋았던 관계가 지금도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관계도 계속 선택해야 한다. 습관이 아니라 의지로. 그게 나답게 사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