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40년 되던 해 2019년 늦가을
4. 마드리드 둘째 날(11.5)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휴일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은 호텔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바로 이웃 건물이다. 10시 개장에 맞춰 20분 전에 도착해서 기다렸으나 10시가 넘어서도 열지 않는다. 입구에서 알림 공고문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30여 분 더 기다렸다.
문제가 있는 것 같아 12시에 점심식사가 예약되어 있는 구 시가 식당을 찾아 나섰다. 아침 날씨가 꽤 차갑고 바람도 조금 분다. 패딩 옷을 입고 나와 다행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휴일이라고 한다. 위치가 가까워서 다행이다.
마드리드 그릴에서 티본스테이크 먹다
아내가 기다리던 시간이다. 아내는 항상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 식초를 곁들인 신선한 샐러드에 딱딱하고 내용이 충실한 따뜻한 빵과 중간 정도 익힌 소고기 스테이크에 소금 뿌려 먹는 식사를 그리워했다.
음식을 그리워하고 식욕을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건강하다는 증거이다. 아내는 탐식은 하지 않지만 음식에 대한 호기심과 먹는 음식에 대한 기억을 매우 뚜렷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 번 식당은 아내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마드리드 그릴(Madrid Grill)이라는 스테이크 식당을 찾아 온라인으로 사전 예약을 했다. 로운리 플래닛에 소개된 식당이다.
식사 내용은 충실했다. 한 킬로 짜리 티본스테이크를 미디엄으로 잘 익혀왔고 따뜻하고 딱딱한 빵 그리고 양이 많은 샐러드 등 모자란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전식으로 포도주를 곁들여 먹은 모둠 하몬 이베리코는 정말 좋았다. 천천히 오래 씹을수록 느껴지는 기분 좋은 고소함과 짭짤함 이란.
하여튼 아내의 소원 풀이를 마치고 배가 가득해져 식당에서 나왔다. 아내는 저녁은 살찌니까 먹지 않겠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저녁이 되어봐야 알지.
가을이 담뿍 담긴 왕궁
식당에서 왕궁까지 걸어갔다. 20여분 거리인데 이때 구글 맵이 도움이 된다. 구글 맵이 때때로 혼란을 주기도 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대강의 방향을 알고 있어서 어려움 없이 도착했다.
왕궁은 마드리드에 살 때 자주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궁의 느낌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가을의 왕궁은 쓸쓸하다. 낙엽이 많이 떨어져 있고 바람이 분다. 구름 속의 햇살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우울한 풍경 그리고 갑자기 화사한 풍경을 연출한다. 건물에 비치는 햇살은 여름의 강렬함이 사라지고 잔잔하고 따뜻하다. 그러나 쓸쓸한 느낌을 준다. 왕궁과 주변 풍경이 함께 어우러져서.
방문객도 많지 않다. 아주 편안하고 좋은 가을 왕궁 풍경을 만끽했다. 왕궁 내부는 들어가지 않았다. 자주 가 보았고 2년 전 패키지여행 때도 들어갔다. 아내도 보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가을 왕궁과 그 주변의 풍경에만 빠져 들어갔다. 다시 와 볼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산 미겔 시장의 타파스 그리고 사람들
19년 전 우리가 마드리드 살 때 기억으로는 산 미겔 시장은 타파스 가게들이 없었다. 질이 좋은 신선한 야채와 과일 들을 팔았다. 종종 토요일 오전 주변 도로에 차를 주차하고 야채와 과일을 산 후 주변 카페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그러던 곳이 지금은 타파스의 명소가 되어 관광객이 넘쳐 난다. 마드리드에 온 관광객이라면 한 번은 꼭 들러야 하는 곳이 된 것 같다. 자료를 찾아보니 2009년에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이 곳은 너무 붐벼 사진 찍기가 불편하다. 나는 와이드 앵글을 사용하여 몇 컷 찍었다. 타파스 가격이 만만하지 않다. 두 사람이 타파스 몇 종류를 입맛에 맞게 먹고 주모(Zumo)로 불리는 생 오렌지 주스 한 잔 씩 마시면 50~60 유로는 금세 없어진다.
다행이다. 아내는 점심을 많이 먹은 탓인지 타파스는 눈요기만 하고 다닌다. 보통 때는 없는 일이다. 1 유로도 쓰지 않았다.
구 시가지를 오가는 사람들
구 시가에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사는 인구도 많지만 관광 구역이기 때문에 상점과 식당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다. 관광객은 말할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가을의 스산한 분위기가 배어있는 좁은 골목길을 오가고 있다. 실은 내가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했던 풍경이다. 길 옆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며 유리창 너머 그 움직임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아내도 이런 풍경들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카페에서 말없이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인내심을 보면 안다. 꼭 수다를 떨어야 제 맛인가?
라 바구아다(La Vaguada) 쇼핑 몰 착각
오후 4시다. 아내가 갑자기 라 바구아다 쇼핑몰을 가자고 한다. 급할 것도 없고 계획도 없는 일정이라 가기로 나섰다. 라 바구아다 쇼핑 몰은 주일에 최소 한 번 가는 쇼핑 몰이었다. 알캄포(Alcampo) 라는 큰 슈퍼마켓이 있어 그곳에서 시장을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억 여행을 하려고 하나 생각했다. 구시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택시 값이 적지 않게 들었다.
무엇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얘기를 안 하니 내가 알 수 없다. 한참 만에 자기가 찾는 구두 가게가 없다고 한다. 그 가게는 차르코(Charco)라고 한다. 이 곳이 아니고 토르레 에우로파(Torre Europa) 건물 옆 모다 쇼핑(Moda Shopping) 지하층에 있다. 아내가 착각했다. 상당히 당황한 눈 빛이다.
차르코는 19년 전에도 모다 쇼핑몰에 있었다. 2년 전 패키지여행 갔을 때도 시간을 내어 잠깐 들렀다. 이제는 나이가 든 주인이 우리를 가까스로 알아봤다. 이 가게는 적당한 가격에 질 좋은 구두를 판다. 특히 아내 취향에 맞다. 70~100 유로이면 신을만한 구두를 산다. 그때 단화 두 개를 사서 지금까지 아끼며 잘 신고 있다.
아내는 그것을 생각하고 가자고 했던 것이다. 미리 생각을 얘기했으면 됐을 텐데 쇼핑한다고 내가 핀잔줄까 봐 머리 쓰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매우 아쉬워한다. 호텔로 돌아오는 택시비도 역시 적지 않다. 다 합하면 구두 반 켤레 값 날아갔다. 아깝다고 생각할 것이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니까 소통이 중요하다. 여행 마치고 돌아갈 때 마드리드를 또 들리니 그때 사자고 위로했다.
비바람 치고 으슬으슬 추워진다
호텔 옆 던킨 도너츠 가계에 커피와 먹거리를 사러 나왔다. 이미 어두워진 거리에 가랑비가 가볍게 뿌리고 바람이 세다. 으슬으슬한 유럽의 전형적인 추위가 느껴진다. 사람들도 웅크리고 걷는다. 가깝다고 옷을 가볍게 입고 나왔는데 몸이 오싹하다.
아내가 좋아하는 초콜릿이 덮인 도넛과 따끈한 아메리카노 커피를 사 왔다. 소파에서 졸던 아내가 눈을 뜨고 반갑게 먹고 마신다. 저녁을 안 먹기는.
그렇다고 그 얘기를 꺼내면 나는 안 먹으려 했는데 누가 사 오라고 했냐고 대답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 모른 척했다. 오랫동안 같이 살다 보니 아내의 심리상태를 대강은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