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40년 되던 해 2019년 늦가을
6. 흐리고 찬바람 세게 불던 세고비아(11.7)
차마르틴 역에서 세고비아 행 고속철을 타다
마드리드에는 우리나라의 서울역 격인 아토차(Atocha) 역과 용산역 격인 차마르틴(Chamartin) 역이 있다. 톨레도는 아토차 역에서 출발하지만 세고비아는 차마르틴 역에서 출발한다.
마드리드에 거주했을 때에도 특별히 차마르틴 역에 가본 적이 없다. 세고비아 가는데 기차 탈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드리드에서 세고비아까지 승용차로 1 시간이면 도착한다. 또 마드리드에서 세고비아 가는 길목에 네바세르라다(Nevacerrada)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지명이지만 그 뜻은 '눈으로 길이 막히는 곳'이다. 눈이오다라는 뜻의 네바르(Nevar)와 닫는다라는 뜻의 세르라르(Cerrar)가 합해진 표현이다. 구불구불한 산길이다. 늦 봄까지 스키가 가능하다. 세고비아 가면서 그곳 정상에 자리한 카페테리아에서 주변 풍경을 보며 잠시 쉬어가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주말이면 쉽게 갔던 세고비아를 여행객이 되다 보니 아침부터 부산하다. 톨레도 갈 때는 아토차 역이 호텔에서 걸어 10분 거리여서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차마르틴 역은 택시로 30분 정도 가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다소 멀게 생각되었다. 기차 출발 시간도 이르다.
출근 시간을 피해 조금 일찍 나섰다. 아침식사는 역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해결했다. 고속철도인 아베(AVE)를 타니 30분 만에 세고비아 역에 도착한다.
찬바람 부는 세고비아 역
세고비아 역은 시내와 많이 떨어진 평원에 외따로 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로운리 플레닛 관광 가이드 북에 따르면 기차역에서 세고비아 입구 로마 대수도교까지 거리가 2.5 킬로 정도이다. 당초 계획으로는 2.5 킬로를 걸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도착해보니 아무도 없는 찬 바람 부는 평원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다. 우선 마드리드보다 훨씬 춥고 바람이 세다.
그런데 역 앞에 버스가 두 대 있다. 관광객 수송을 위한 예약버스로 생각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시내버스 아닌가? 세고비아 시내와 기차역을 열차 도착 시각에 맞춰 운행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로마 대수도교 주변 정류장에 내렸다.
세고비아는 과거 카스티야 왕국(The Crown of Castilla)의 중심지역이다. 지대가 높은 평원이다. 그래서인지 마드리드 보다 기온이 섬뜩할 정도로 차갑고 바람이 세차다. 더구나 잔뜩 흐린 날씨라 체감 온도가 더 낮다. 춥다.
역사를 나오면서 아내가 갑자기 소 똥 냄새가 난다고 한다.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내는 특히 후각과 청각이 예민하다. 전생이 개과 인가 할 정도로 후각이 항상 정확했다. 주위는 온통 녹색 초지이고 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오후에 다시 오니 소들이 초지에 넓게 흩어져서 풀을 뜯고 있었다. 역시 정확했다.
세고비아 관광명소 들
세고비아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관광 명소가 많다. 1세기 로마 통치 시절에 건설된 대수도교, 월트 디즈니에게 잠자는 숲 속 미녀의 성 영감을 주었다는 알카사르 성, 세고비아 대성당, 플라자 마욜 광장 등이 있다. 또 주변 풍경도 아름답다. 톨레도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로마 대수도교는 높기도 하지만 자료에 따르면 현재 남아있는 수로 유적의 길이가 무려 894 미터이다. 2000년 전에 어떻게 저런 수로를 건설할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잘 건설했길래 지금까지 남아있는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잔뜩 흐린데다가 찬 바람이 세차게 불어 수도교 주변을 걸어서 오르내리는 길이 산만하다. 또 중국 단체 관광객들의 외치는 소리와 그들의 무질서한 움직임으로 더욱 그렇다.
세고비아 길은 톨레도 수준의 미로는 아니다. 그러나 수도교에서 세고비아 대성당이 있는 광장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 골목길이다. 대충 방향을 설정해 걷다 보면 문득 광장과 대성당을 만나게 되어있다.
여러 번 와본 곳이어서 성당 안은 들어가지 않았다. 여행 출발 전에 새로 마련한 아이폰 11에 장착된 울트라 와이드 앵글을 사용해서 성당 전체 사진을 찍으려 하니 중국 관광객들이 방해한다. 오늘 세고비아는 가는 곳마다 중국 단체 관광객으로 어지럽다.
종종 보이는 한국 관광객들은 조용하고 걸음걸이도 얌전하다.
아내는 대성당에 관심 없다. 광장에 임시로 설치된 과일과 채소 시장을 기웃거리며 무엇을 사볼까 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사진 그만 찍고 잠깐 와 보세요' 소리가 가늘게 들린다. 물건 값 계산하라는 얘기인 것 같다. 부르는 소리는 크지 않아도 아내 목소리라 멀리서도 잘 들린다.
카페테리아에서는 더욱 그렇지만 노점상에도 물건을 사는 순서가 있다. 노점상에 도착한 순서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노점상 주인은 안보는 것 같지만 고객이 온 순서를 아주 명확하게 기억한다. 아마 경험으로 훈련이 되어 있을 것이다. 순서가 아니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질문에 대꾸도 하지 않는다. 순서에 해당하는 고객에게만 100% 집중해 서비스 한다. 서두루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리면 자기 차례가 온다. 옆에서 중국 청년이 바나나 한송이 들고 가격을 물어보는데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아마 경험이 없어서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다. 질서의 문제이다. 이제 아내 차례가 되었다. 비로서 노점상 주인이 웃으며 눈을 맞춘다. 아내는 아스파라거스 두 묶음, 작은 당근 7개, 감 2개 사서 백 팩에 넣었다. 여행하다 보면 채소 섭취가 부족하니 호텔에 들어가 삶아 먹어야겠다고 한다. 현명한 생각이다. 그리고 조리기구가 다 갖추어진 아파트 호텔이니.
성당에서 오른쪽으로 골목길을 한참 내려가다 보면 그 끝에 알카사르 성이 있다. 여기서도 중국 관광객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수도 많고 왔다 갔다 하며 뒤에서 밀고 옆에서 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종종 귀 가까운 곳에서 크게 얘기하니 방심하고 있다가 깜짝 놀랜다. 그래도 그들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몇 컷 찍기는 했다.
오늘은 성 내부가 개방되지 않았다. 내부에서 정부 행사를 하고 있다. 군인들이 쫙 깔려 경비를 삼엄하게 하며 성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아내와 나는 이미 성 내부를 여러 번 봤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지만 좋은 와이드 앵글을 사용해 내부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다소 아쉽다.
알카사르 성은 높은 곳에 서있다. 성 아래 펼쳐진 세고비아 평원이 아스라이 멀리 보이며 아름답다. 날씨가 좋았으면 더 보기가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흐린 날씨도 잔잔한 늦가을의 정취를 품고있어 좋다.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고 보고 싶었던 평원 풍경이다.
골목길의 작은 카페
알카사르 성에서 다시 돌아오는 골목길의 바람은 차고 매서웠다. 화장실도 갈 겸 주변을 둘러보는데 낡은 목조 문 유리창 너머로 할아버지들이 모여 커피 마시는 것이 보인다. 눈에 잘 띄지도 않은 동네 작은 카페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노인들이 낯선 동양인들을 빤히 쳐다본다. 밖에서 보기보다 좁지않고 조촐한 카페테리아이다. 실내 공기가 적당하게 훈훈하다. 따뜻한 커피에 초리조를 얹은 타파스를 곁들여 먹었다. 30여 분 쉬다가 나왔다.
세고비아 역에서 본 평원 풍경
대수도교 주변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엉성한 점심을 먹었다. 특별하게 더 돌아다닐 생각이 없어 예정보다 빠르게 마드리드로 돌아가기로 했다. 기차역 가는 시내버스 정류장을 찾아가 시간표를 보니 버스가 30분 뒤에 온다. 찬 바람 부는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도 추운 정류장에서 찬 바람을 피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그것도 아주 느긋하게.
시간이 되니 버스는 정확하게 도착했다. 시내버스는 현금을 내고 탄다. 기차역까지 1유로 83센트란다. 도데체 어떻게 계산을 했기에 끝 자리가 83센트인지... 5 유로 지폐를 냈더니 크기가 다른 동전을 잘 정리해 놓은 목재 보관함을 열어 거스름 돈을 천천히 센트까지 잘 챙겨 준다. 역시 '급할 것 없는 스페인 사람' 답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버스는 매우 쾌적하다.
다시 세고비아 역으로 돌아왔다. 오후 4시 기차인데 2시에 도착했다. 그동안 날씨가 좋아졌다. 햇살이 보인다. 햇살 속에서 주변 평원은 더 광활하게 보인다. 찬 바람을 맞아가며 풍경 몇 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역에서 기차 시각표를 보니 마드리드 행 아베(AVE)가 2시 30 분에도 있다. 잘 됐다 생각하고 매표소에서 승차권을 교환했다. 그런데 돈을 더 내라고 한다. 탑승 요금이 기차 시간에 따라 다르다. 편리한 시간대는 더 비싸다. 새벽이나 오후 늦은 시간 그리고 밤에는 더 저렴하다.
세고비아를 여러 번 와 봤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 몇 가지를 새롭게 경험하며 세고비아를 떠난다. 마드리드로 간다. 아디오스 세고비아! (Adiós Segovia !)
모다 쇼핑에서 구두 사기
차마르틴 역에서 호텔로 돌아오는 길 중간에 아내가 가고자 했던 모다 쇼핑몰이 있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마드리드에 두 시간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들르기로 했다. 이 쇼핑몰은 사무실이 있었던 토르레 에우로파(Torre Europa) 빌딩 바로 옆 건물이기 때문에 점심먹으러 매일 들렀던 곳이다.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내가 기억하는 몇몇 상점들이 그대로 그 자리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 기억에 남아있는 가게 주인장 얼굴들도 보인다. 대체적으로 머리 숫이 적어졌고 비만해졌다.
지하 1층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차르코(Charco)에 갔다. 얀코(Yanko)나 로투세(Lotusse)같은 스페인 유명 구두를 팔기도 하지만 차르코 라고 불리는 자기 상점 브랜드로 구두를 만든다. 나는 구두를 이 곳에서 구입했고 지금까지 신고 있다. 가격과 디자인 그리고 품질이 좋아 가성비가 높다.
아내는 그것을 알고 있다. 자기가 원하는 겨울용 단화 한 켤레를 샀다. 그러려고 구두를 가져오지 않고 운동화만 신고 왔다. 참 사려가 깊고 기획력이 풍부한 사람이다. 74 유로를 지불했다. 우리나라 신발 가격과 비교해 생각해보면 너무 저렴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구두 가격은 왜 그렇게 비쌀까?
톨레도와 세고비아 단상
톨레도와 세고비아는 내게 그곳의 가을 골목의 고즈넉함과 가을 평원의 맑고 쓸쓸함을 선물로 주었다. 물리적으로 보는 것은 사진으로 남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내 기억의 창고로 들어간다. 그리고 마음이 번거롭고 어지러울 때 문득 꺼내서 보는 기억의 자산이 된다. 톨레도의 골목 풍경과 세고비아의 평원 풍경들 ... 그것들이 내 마음에 숨어있는 어두움을 어루만져 치유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