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꽂혀 있었어요
지하철 노인석에 앉아 있다가 백발의 두 할머니가 내 앞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흔을 넘기면서 이제 조금은 마음 놓고 노인석에 앉는다. 그래도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조심스럽다. 나보다 연세가 많아 보이는 분이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게 된다.
노인석 한 자리가 또 비자, 서 있던 할머니도 의자에 앉았다. 나란히 앉은 두 분의 백발이 멋있어 보인다. 나는 앞머리 쪽에 새치가 올라오면 그냥 놔두다가 사람들과 만날 약속이 생기면 새치만 염색한다. 언젠가 흰머리가 많아지면 염색하지 않고 저분들처럼 그대로 놔둬도 괜찮을 것 같다.
조금 뒤, 두 분 옆에 앉았던 할아버지가 내릴 준비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동시에 두 할머니가 앞에 서 있는 나를 향해 어서 앉으라고 손짓했다.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니 “자리를 양보했잖아”라며 웃으신다. 내릴 때 두 분께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하자, 잘 가라며 손을 크게 흔들어 주신다.
처음 본 분들이었지만 손짓과 웃음만으로도 따뜻함이 전해졌다. 좋은 징조였을까?
전철에서 내린 후 동네 도서관에 들러 <레슨 인 케미스트리>를 빌렸다. 미국 작가 보니 가머스가 쓴 두 권짜리 장편소설이다. 지금 읽고 있는 영국 소설가 줄리언 반스의 <또 이 따위 레시피라니>(The Pedant in the Kitchen)처럼 요리와 관련된 이야기라며 지인이 소개해준 책이다.
줄리언 반스와 보니 가머스가 쓴 책은 둘 다 요리를 다루지만 시선이 다르다.
반스는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가로 뒤늦게 요리를 책으로 배워가면서 요리책의 정확하지 않은 표현에 투덜댄다. ‘포도주 한 잔’의 양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떤 크기의 잔에 얼마만큼 넣으란 건지를 까칠하게 따진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조트는 화학자다. 성차별이 심했던 1960년대, 임신했다는 이유로 연구실에서 해고당했다. 엘리자베스는 요리 프로그램 ‘6시 저녁 식사’를 맡으며 스타가 된다. “다음으로 염화나트륨을 넉넉하게 넣어주십시오”라며 요리를 화학 실험처럼 접근한다. 엘리자베스는 시청자들에게 단순히 요리법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화학은 변화”라며 현재 상황을 바꿔보라고 촉구한다.
맨 앞 줄에 앉은 한 방청객이 자신의 다리 부종이 “혈장 단백질의 불규칙한 삼투성 반사 계수와 잘못된 투수 계수가 결합해 생긴 부산물이 아닐까요?”라고 질문한다. 평소 의학 잡지를 즐겨 본다는 가정주부다. 다섯 아들의 상처를 꿰맨다며 한때 개흉 심장 수술을 하는 외과의사가 꿈이었다고 불쑥 고백한다. 여자 의사가 거의 없던 60년대, 허황돼 보이는 가정주부의 꿈에 스튜디오 안은 순간 적막이 흘렀다. 누군가 손뼉을 치기 시작하자 잠시 후 모든 사람이 발을 구르며 손뼉을 쳤다. 엘리자베스는 “부인은 문제없이 할 수 있습니다”라며 용기를 주었고, 그 후 부인은 의대에 진학해서 자신의 꿈을 이뤘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의 책장을 넘기다가 책 사이에서 물망초 자수 책갈피를 발견했다. 두 겹으로 덧댄 노방 원단이 섬세하고 고급스럽다. 내 바로 전에 책을 빌린 사람이 급히 반납하느라 깜빡한 걸까? 나 역시 반납 기한에 쫓겨 허둥댄 적이 많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아니면 설마 다음 사람이 기분 좋게 읽으라고 일부러 책갈피를 보물처럼 숨겨놓았나?
책갈피 위쪽에 ‘물망초’, 그 바로 밑에 ‘Forget me not’이라는 글귀가 곱게 수놓아져 있다. 그 덕분에 꽃 이름을 알게 되었다. 다섯 장의 하늘색 꽃잎이 작고 정교하다.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익숙한 꽃말과 함께 물망초란 이름은 수없이 들었지만 정작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랐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내가 좋아하는 파란빛이다. 분홍색과 흰색도 있다고 한다. 참 앙증맞고 사랑스럽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에는 끈 책갈피가 없어 지하철에서 읽을 때마다 물망초 책갈피를 요긴하게 썼다. 하지만 예쁜 책갈피를 혹시 떨어뜨려 잃어버릴까 봐 조심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나한테 이 책과 어울리는 책갈피가 하나 있다. 이 책갈피에는 ‘물’, ‘불’, ‘공기’, ‘흙’(WATER, FIRE, AIR, EARTH) 네 가지 그림이 글자와 함께 작은 네모 상자 안에 그려져 있다. 지난 유럽 여행 때 항공사로부터 받은 것이다. 자연을 이루는 이 네 기본 요소들이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온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화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였다. 종이라 가볍게 들고 다니기 좋고 잃어버려도 덜 아깝다.
나중에 책을 반납할 때 이 종이 책갈피도 책 사이에 끼워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권에는 네 원소가 그려진 책갈피를, 2권에는 섬세한 물망초 책갈피를. 전철이나 버스에서 읽을 때는 잃어버려도 아쉽지 않은 종이 책갈피를 쓰고, 집에서는 고급스러운 노방 책갈피를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전철에서 자리를 양보했을 때 고맙다고 환하게 웃어준 두 할머니 그리고 책을 빌렸던 누군가가 남겨둔 물망초 책갈피 덕분에 미소가 절로 나오는 따뜻한 하루였다. 다음에 이 책을 읽을 사람도 책갈피를 보며 나처럼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