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와 지금의 사이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미국 작가 보니 가머스의 첫 소설이다. 65세 생일을 며칠 앞둔 2022년 4월에 출간돼 단숨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42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가머스는 직장에서 직접 겪은 억울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썼다. 테크 업계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그녀는 열심히 준비한 백만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 제안서를 발표했다. 반응이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방 안을 가득 메운 동료들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그때 한 남성이 앞으로 나와 그녀가 방금 제안한 내용을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되풀이했다. 그러자 같은 내용임에도 동료들은 일제히 "훌륭하다"며 박수를 보냈다. "그건 조금 전 제가 발표한 내용 아닙니까?"라고 가머스는 항의했지만 마치 없는 사람인양 무시당했다. 그 프로젝트의 성과는 아직도 그 남성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팀원 한 사람이 다섯 시까지 정리 끝내는 것을 잊지 말라고 그녀에게 말하자, 가머스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곧장 책상으로 달려가 정리 대신 소설의 첫 장을 단숨에 써 내려갔다.
가머스는 소설 주인공의 삶에 자신이 겪은 수모를 투영시켰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조트는 이렇게 탄생했다. 엘리자베스는 뛰어난 화학자다. 그렇지만 여성이란 이유로 연구실에서 무시와 차별을 받았다. 임신했다는 이유로 일자리도 잃었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빼앗겼고, 사회는 그것을 당연한 일처럼 여겼다.
가머스는 자신의 분노를 글로 승화시킨 선택이 아주 잘한 일이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가머스는 또한 1963년에 발간된 베티 프리던의 <여성성의 신화>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프리던의 책이 나온 1960년대를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하고 성 역할의 고정관념과 여성 차별이 만연했던 그 시대를 그려냈다. 작품 제1장의 제목은 '1961년 11월'이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서른 살로 지금 살아 있다면 94세가 되었을 것이다. 가머스의 어머니 세대다.
가머스에게 엘리자베스 조트는 단순한 소설 속 인물이 아니었다. 늘 책상 옆에 함께 앉아 있는 존재였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가머스는 생각했다. 엘리자베스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엘리자베스는 냉정하게 "오늘 하루 힘들었다고? 나는 10년 동안 힘들었다!"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위의 이야기는 출간 다음 해인 2023년 12월 16일 영국 <가디언> (The Guardian) 신문 인터뷰 기사에 소개되었다.
가머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얼마 전 여의도 더현대 ALT.1에서 본 <앨리스 달튼 브라운 회고전>이 떠올랐다. 올해 86세인 앨리스 브라운은 1960년대에 막 스물을 넘긴 젊은 화가였다. 전시장 인터뷰 영상에서 브라운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시절 예술 활동은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여성은 아무리 재능과 열정이 있어도 세상이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그런 환경에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온 브라운의 성취가 더욱 빛나 보였다.
1960년대에도 미국은 성차별에서 그래도 자유로웠을 거라고 나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보니 가머스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리고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회상을 들으며 1960년대 여성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문득 1980년대 미국 유학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부시에 맞서, 민주당은 월터 먼데일을 대통령 후보로, 제럴딘 페라로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페라로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였다. 당선된 것도 아니고 단지 여성이 후보로 지명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화제가 된 그때의 분위기가 많이 놀라웠다. 그것은 여성 부통령 후보의 등장이 얼마나 낯설고 특별한 사건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세월이 흘러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엘리자베스 조트처럼 임신했다고 실험실에서 해고당하지 않으며, 앨리스 달튼 브라운처럼 성별 때문에 작품이 외면받을 걱정도 없다. 제럴딘 페라로가 이루지 못했던 부통령 자리를 카멀라 해리스가 현실로 만들었고, 여성 대통령 후보도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무엇보다 보니 가머스처럼 여성이라는 이유로 목소리가 무시당하는 시대는 더욱 아니다.
물론 여전히 유리천장은 존재하고, 성별에 따른 차별과 편견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고, 변화를 요구할 수 있으며, 그 목소리가 침묵으로 묻히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엘리자베스 조트가 꿈꾸던 시대일 것이다.
하지만 이 변화는 결코 당연한 결과는 아니다. 수많은 엘리자베스들의 용기와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변화가 가능했다. 원하는 일을 하고, 원하는 책을 읽고, 원하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음에 감사하다. 나는 가머스의 책을 덮으며 다음 세대가 맞이할 세상은 더 공정하고 더 자유로우며, 그리고 우리보다 더 당당하게 꿈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