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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 May 31. 2023

롤모델 은사님 부부

며칠 전 우리 부부는 결혼식 주례를 서주신 남편의 대학 은사님과 사모님을 만났다. 결혼한 지 40여 년이 훌쩍 넘어갔으니 세월은 참 빠르기도 하다.


코로나 이전에는 큰일이 없는 한 1년에 한 번 은사님 부부와 만났다. 시작은 아마도 30대 중반이었던 남편과 내가 공부를 끝내고 직장을 얻은 다음부터인 것 같다. 처음 한동안은 댁으로 찾아뵈었다. 교수님 댁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꽃들이 예쁘게 알록달록 피어 있는 너른 마당이 떠오다. 사모님이 손수 만드신 깨강정과 차를 담은 예쁜 찻잔도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어수선하게 살고 있던 때라, 교수님 댁의 정갈한 분위기가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바느질 솜씨도 베테랑급이신 사모님은 어떤 때는 보온병을 넣는 천 가방을, 또 어떤 때는 조각보 에코 백을 만들어 선물로 주셨다. 보온 가방과 에코 백들은 지금도 감사한 마음으로 잘 쓰고 있는 나의 애장품들이다.


교수님은 그동안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옮기셨고, 우리도 이제는 댁으로 찾아뵙지 않고 밖에서 만나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교수님은 세는 나이로 90세시다. 사모님은 교수님보다 몇 살 아래시다. 만나 뵙기 시작한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두 분 모두 별로 변하지 않으셨다. 따뜻하게 챙겨주시는 마음과 인자하신 미소는 처음 그대로다. 머리만 하얗게 변하셨다. 백발이 멋지신 두 분은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띈다. 우리를 보시곤 환하게 웃으신다. 교수님은 다리가 좀 불편하신 사모님의 손을 잡아주신다. 손을 잡고 걸어가시는 두 분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두 분을 만나 뵙지 못했기 때문에 그간 밀린 소식들을 주고받았다. 직장을 다니는 따님을 위해 돌봐주셨던 외손자가 제대를 했다고 하셨다. 사모님이 만드신 반바지를 입고 재롱을 부리던 아이가 군복무까지 마쳤다니 또 한 번 빠른 세월의 흐름을 느낀다. 공부를 잘하던 친손녀는 가고 싶어 하던 대학에 들어갔다며 자랑스러운 미소를 띠셨다.


우리는 아들네가 얼마 전 낳은 손자의 사진을 보여드렸다. 두 살 배기 외손녀가 잔디 위에서 공을 차는 동영상도 틀어드렸다. 교수님 댁 마당에서 팔짝팔짝 뛰어다니던 꼬마들이 어느새 커서 아기의 엄마와 아빠가 된 것이 신기하다시며 딸 가족이 미국에서 오면 꼭 같이 만나자고 하신다.


교수님은 나이 든 스승을 잊지 않고 연락해 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정작 고마워할 사람은 우리다. 70세를 코 앞에 둔 나는 10년 뒤, 20년 뒤의 내 모습이 안갯속에 숨은 섬처럼 흐릿하기만 하다.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은사님 부부를 뵈면서 90세에도 여유롭고 멋질 수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낀다. 얼마 전에 만난 74세, 77세 선배 언니들의 활력 있고 당당한 모습을 보면서도 덩달아 나까지 힘이 났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두렵지 않아진다. 둥근 마음이 된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내 삶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른다. 80세까지? 90세까지? 정말 100세까지? 운이 나쁘면 아프면서 오래 살 수도 있다. 앞서 걸어가고 있는 분들을 만나면 흐릿했던 미래가 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앞으로의 내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만나 뵙고 싶고, 따라가고 싶은 분들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은사님 내외분처럼 우리 부부도 품위 있고 아름답게 나이를 먹었으면 좋겠다. 롤모델이 되는 좋은 분들과 함께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게 식사를 하고 오니 5월의 푸른 하늘에 걸린 흰 구름처럼 내 마음도 두둥실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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