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늘 하던 말

by 기혜선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머뭇거리던 오 차장은 대뜸 말을 뱉었다.

당신 기획안 좋더라.


정혜는 기뻤다. 오 차장과 많은 일을 했지만 대놓고 칭찬을 하는 일은 드물었다.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한 일에 정혜를 투입한다는 게 그저 칭찬이라고 여기고 지냈다. 달뜬 정혜의 감사하다는 인사 뒤로 오 차장이 말을 이었다.


그 기획안, 임원 회의에서 발표합시다. 그런데….

내가 발표하면 안 될까? 이번 분기에 기획팀에서 추진하던 사업들이 다 그저 그랬잖아. 어제 임원진들이 그럴듯한 성과는 언제 만들 거냐고 하는 거야.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뼈 없는 농담이 어딨어. 지금까지 내가 해온 건 생각도 안 하고 매번 이런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걸 했는데, 매번 새로운 걸 해내라니. 어쩜 그러니. 내 이름의 기획안이라고 해도 결국 기획팀 성과 될 거니까. 정혜 대리에게도 이득이잖아. 어차피 사업은 기획팀 전체에서 추진할 거고….

머뭇거리던 오 차장의 말이 빨라졌다. 오 차장에겐 정혜의 기획안인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결국 기획안은 기획팀 전체의 일이고 함께 공유될 일이었다. 평소 정혜 씨라고 부르던 호칭이 어느새 정혜 대리로 바뀌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혜는 예상하지 못한 일에 잘 대처하지 못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오 차장 말에 정혜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정혜도 평소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네? 네, 네? 아...

그런데.. 아... 지난번에 부사장님이 사무실 오셨던 날이잖아요. 제가 차장님 드리려고 출력하면서 제 것도 출력했었는데, 제 책상에서 그거 휘리릭 넘겨보셨는데 괜찮을까요? 아, 아니다. 부사장님은 기억 못 하실 것도 같아요. 그날도 워낙 농담하고 웃고 가셔서요. 아, 근데 혹시 보셨으면 어쩌지? 그럼, 파일을 넘겨드려요? 아니면….

말을 끝맺지 못하는 정혜에게 옮은 듯 오 차장도 더듬기 시작했다.

아니야. 정혜 대리. 아니야. 이게 퇴근 후에 할 말은 아니었네. 내일, 내일 이야기합시다.

전화는 급작스럽게 끊겼다. 정혜는 태풍이 몰아친 느낌이었다. 진정해 보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밤새 뒤척이다 보니 자존심 센 오 차장이 자신에게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다급했던 걸까 싶기도 했다. 어쩌면 정혜만큼은 자기 말에 선선히 수락할 줄 알았던 걸까? 그렇다고 해도 애써 이해한다고 해도 정혜의 노력을 고스란히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정혜는 출근해서 오 차장이 다시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할까 내내 생각했지만 결정할 수 없었다.


다음날 정혜가 출근하고 보니 오 차장은 외근이라고 했다.

기획 1팀 사무실에는 정혜 자리 왼쪽으로 창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옆 건물과 인접한 탓에 얼룩덜룩한 시멘트벽을 따라 오른쪽으로 고개를 쭉 빼야 손바닥만 한 하늘이 겨우 보이는 창이었지만 정혜는 사무실에서 창가를 제일 좋아했다. 정혜는 가끔 그 앞에 섰다. 아래쪽만 겨우 빼꼼히 열리는 창문이지만 그 창문이라도 열면 사무실 공기가 조금은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없이 바쁜 날에도 잠깐 창문 앞에 서 있으면 숨통이 트였다. 정혜는 그날 오후 내내 몇 번이나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오 차장이 오후에는 들어올 줄 알았다. 자신을 찾을 줄 알았다. 그날 처음으로 정혜는 이 작은 창문이 너무 답답하다고 느꼈다.


역시 차장님! 훌륭하십니다. 저희에게 기획안 생각해 보라고 하시더니 직접 이렇게 만드셨어요? 아이고 저희가 송구스럽습니다!

정혜는 후배 상수가 임원 회의실에서 발표를 마치고 나오는 오 차장 옆에 바짝 붙으며 하는 말을 들었다. 오 차장이 상수에게 빙긋 웃어주는 것도 보았다. 오 차장이 발표한 기획안은 정혜의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분명히 정혜의 것이었다. 그날 이후 아무 말도 없던 오 차장이었다.


정혜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오 차장에게 면담을 청했다. 그 자리에서 오 차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 기획안 아이디어가 새롭나요? 내가 늘 하던 말들이잖아요.

정혜 것인지 오 차장의 것인지 모를 그 사업은 소위 대박이 났다. 그 해 기획팀은 이전 분기 지지부진한 실적에도 불구하고 인센티브를 두둑이 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잘 된 거잖아. 결국 잘 됐잖아. 정혜는 잊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렇게 잊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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