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집중력> 요한 하리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강제 디지털 디톡스
중요한 회의에 가는 길이었다. 어려운 자리였기 때문에 회의록을 미리 꼼꼼하게 읽고, 늦지 않으려고 일찌감치 준비를 하고 여유 있게 집에서 나섰다. 며칠간 몰아친 한파에 목도리, 장갑 등등 챙겨야 할 것이 많았다. 버스 카드는 잃어버리거나 허겁지겁 찾지 않도록 손이 잘 닿는 외투 주머니에. 건조할 때 바르는 립밤은 가방 보조 주머니에. 그리고 습관적으로 꼽는 무선 이어폰은 양쪽 귀에.
너무 추웠던 탓에 지하철 역까지 종종걸음으로 걸어 막 들어오는 열차에 몸을 싣고 알았다.
핸드폰이 없다.
열차가 다음 역을 향해가는데, 순간 내려야 하나 싶었다.
지하철 이동시간은 편도 40여분. 회의는 두어 시간 이어질 테고 다시 돌아오는 시간까지.. 약 서너 시간 동안 핸드폰 없이 살아야 한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쩌지?
도둑맞은 집중력
책은 인터넷이 되지 않는 핸드폰을 원하는 저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핸드폰 매장 직원은 그런 핸드폰을 찾는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이 묻는다.
직원 : 긴급 상황에서는 어떡하려고요?
저자 : 제가 온라인에 접속해야 할 긴급 상황이 뭐가 있을까요? 나는 미국 대통령이 아니잖아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도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어요.
직원 : 뭐든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잖아요.
(p34)
조마조마한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가만히 생각해 본다.
핸드폰이 나에게서 이렇게 오래 떨어진 것은 거의 10년 동안 없었던 일이었다. 어쩌면 10년도 훨씬 넘었을 수 있다. 나가기 전에는 핸드폰을 꼭 확인했고, 혹시라도 두고 오면 다시 들어갔다. 핸드폰이 있으니 잘 모르는 동네도 찾아갈 수 있고, 아리송한 지식은 바로 검색할 수 있으며 혹시라도 생기는 변수에 빠른 대처를 해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활 덕분에 우리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고, 여유는 일부러 찾아야 하는 것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출발한 열차에서 내려 핸드폰을 가지러 돌아갔다 오면 회의에 엄청나게 늦을 것이 분명했다. 불안을 다독이며, 이 기회에- 그동안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디지털 디톡스라는 걸 해보자 싶었다.
우리는 언제부터 바로바로의 삶을 살았을까. 급한 성격상 오는 연락에 바로 회신해야 하고 궁금한 것은 바로 찾아봐야 하며 용건이 있으면 바로 메시지를 남기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당연하게 행하던 것들을 생각해 보니 이렇게 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집전화를 주로 쓰던 시절. 나의 초등학교 졸업앨범 맨 뒷 장에는 전교생의 집 전화번호가 빼곡히 기재되었다. 당시에는 전화를 걸어 "OO이 있어요~?"라고 물어야 했고, 혹시라도 없으면 "~ 전해주세요." 하고 메시지를 남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전달되어야 하는 메시지는 당연히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공중에서 사라지는 일도 많았다. 당장 하고 싶은 말은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날 학교에서 만나면 하는 것이 당연했다. 3분 이내의 통화가 미덕이라는 캠페인이 돌던 시절이었다. 만나자는 약속에서는 그저 기다려야 했고 혹시라도 어긋나면 허탕치고 돌아오는 일도 많았다. 중학교 졸업할 때쯤 삐삐가 나오면서 공중전화에 불이 나긴 했지만.
불과 30년 조금 넘은 시간 동안 세상이 정말 많이 변했다. 졸업앨범 뒤에 기재된 전화번호가 전혀 쓸모없어질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갑자기 그 시간들이 떠올랐다.
보통 우리는 쉬운 길로 가고 싶어 해요. 하지만 우리가 행복할 때는 약간 어려운 일을 할 때거든요. 핸드폰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늘 중요한 것보다는 쉬운 것을 제안하는 물건을 언제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게 된 거예요.(p54)
핸드폰이 사라지자 세상의 큰 부분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p74)
가는 곳마다 자신을 방송할 뿐 다른 정보는 수신하지 않는 사람들로 둘러싸이는 느낌이었다.... 팔로어 수가 늘면 기분이 좋았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봤지? 널 팔로우하는 사람이 늘었어. 너는 중요한 사람이야 (p76)
내가 20년 넘게 온종일 수많은 사람과 신호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P77)
긴 회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핸드폰이 없으니 지하철에서 할 일이 없었다. 늘 들고 다니던 책은 오늘따라 핸드폰에서 문서를 검토할 요량으로 빼놓았던 터였다. 결국 꾸벅꾸벅 졸다가 한결 개운해진 느낌으로 지하철에서 내렸다. 내내 부족했던 수면을 보충한 느낌이랄까.
약 네 시간 동안 밀린 메시지에 답을 하고 받지 못한 전화통화를 하고 나니 그만큼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디지털 디톡스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메시지나 연락 사항이 가장 불안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아쉬운 점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서울 도심의 사진을 찍고 싶었고, 회의 후 나온 비싼 솥밥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핸드폰이 없으니 아쉬운 게 한둘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우리는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는다. 자신이 선택을 내린다고, 어디에 주의를 기울일지 결정하는 복잡한 정신을 가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건 다 환상이다. 살면서 경험한 강화훈련의 총합이다..... 사용자에게 하트와 좋아요를 줘서 셀카 찍는 행동을 강화한다면 사용자들은 강박적으로 사진 찍기를 시작할까? (p82~83)
주의를 분산하는 요인들과 자신을 분리해야 하지만 의지력으로 그것을 해내는 것은 매우 힘들다. 우리를 부르는 정보에 저항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거든요. (p67)
나 역시 그간 SNS에 강화 훈련 당한 현대인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저러나 핸드폰을 돌려받으니 편하다.
마음도 몸도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