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름은 알아야지요.

by 기혜선

비행기 착륙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지만, 한자가 가득 쓰인 누런 종이에는 빈칸이 남아있었다. 남편과 나는 당황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떡해. 이럴 줄 알았으면 애들 이름을 좀 쉽게 지을 걸 그랬네.” 아무리 다시 써봐도 두 아이의 이름 한자가 생각나지 않았다. 좋은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돈을 내고 한자를 조합한 게 화근이었나보다. 고1 한문 시험에 학교 이름을 한자로 쓰라는 주관식 문제가 있었다. 나는 학교명과 동일하게 맑을 숙자를 쓰는 친구를 떠올렸다. 이 문제를 받은 그 친구는 얼마나 좋을까. 그때 나는 앞으로 내 아이의 이름은 어려운 한자를 써야겠다고, 은혜 혜, 착할 선처럼 누구나 다 아는 한자를 쓰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작명원에서 아이 이름을 보내왔을 때 마음에 들었다. 큰아이의 이름은 보고 그려야 할 정도로 복잡했고, 작은 아이의 이름은 한자 시험에 자주 나올 법한 글자였다. 일본 입국 심사서에 한자로 이름을 적어야 하는 줄은 몰랐다. 큰아이 이름 어딘가에 힘 력이 들어가고, 마음 심이 들어가는 건 생각이 났다. 설상가상으로 쓸 수 있을 줄 알았던 작은 아이 이름도 정확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느 해엔가 나왔던 아버지 이름을 한자로 적으라는 주관식 문제를 마주했을 때처럼 우리는 입국 심사서에 오답을 가득 적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나의 이름을 큼직하게 적은 입국 심사서 아래 아이들의 입국 심사서를 끼워 넣었다. 채우지 못한 아이들의 입국 심사서 이름란 아래에는 작게 영어를 적었다. 입국 심사 줄이 줄어들수록 내 심장은 더 크게 뛰었다. 급기야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정도였다. 끝까지 알아 오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로밍도 하지 않은 나의 폴더폰에는 영어사전은 있었지만, 옥편은 시원치 않았다.


“일본에 오면서 이름 한자도 모릅니까? 이 정도는 알아 와야지요.”

투명한 부스 안에 있던 제복을 입은 남자가 능숙한 한국어로 말했다. 일본어 억양이 섞여 있었지만 분명하고 단호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공항을 나오는 내내 그 화끈거리는 얼굴이 가라앉을 줄 몰랐다. 네 식구의 첫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나는 도라에몽의 만능 주머니 같은 수첩을 준비했다. 엑셀에서 작성한 2박 3일 여행 일정표와 후쿠오카 지도를 꼬깃꼬깃하게 접어 붙였고, 추천하는 쇼핑 목록, 비상시 대처 방법, 계획이 틀어졌을 때 대안, 맛집 정보까지 빼곡하게 정리했다. 비록 읽을 줄 모르지만, 비상시에 사용할 일본어도 그려두었고 그 아래에 한국어 발음도 잊지 않았다. 성적은 안 나오지만, 누구보다 공부는 열심히 하던 ‘무늬만 모범생’의 자세였다. 학기 초에 친하게 지내자던 아이가 나의 성적을 알고 나서는 데면데면하게 굴던 그 씁쓸함을 이겨내는 방법은 공부하는 것밖에 없다고 스스로 가두던, 그 과한 성실함은 매사 진지하고 열심히 사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여행도 그랬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얼 보여주겠다거나 교육을 목적으로 여행을 계획한 적이 없었다. 아이들은 나의 동행자일 뿐이었다. 나는 자주 다른 공간에서의 나를 꿈꿨다. 아무것도 되지 못한 그저 무늬만 모범생인 나 말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의 자유로운 나를 상상했다. 그러다 여행이 잡히면 나는 또다시 그 과한 성실함을 장착했다. 한치의 부족함도 어긋남도 없는 완벽한 여행을 꿈꾸며 분 단위로 계획을 짜고, 교통편마다 금액을 적어넣고, 혹시 먹고 싶은 메뉴를 잘못 시킬까 봐 사진을 출력했다.


화끈거리는 얼굴이 겨우 진정되었을까. 비행기에서부터 너무 오래 매달려 있던 돌쟁이 아들이 답답하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나는 아들을 달래며 20분만 참아달라고 속삭였다. 공항 셔틀버스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아들이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아기띠만 풀어줘도 괜찮을 텐데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사람들이 나와 아들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의 얼굴이 다시 화끈거리고 있었다. 하카타역 바로 앞 호텔에 도착하기까지 그 30분의 여정이 어찌나 길었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자주 흩어졌고 우리는 자주 멈춰 섰다. 체크인하고 올라온 좁은 호텔방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남편과 아이들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수첩을 펼쳤다. “다음 일정은 지워야겠지? 대신 할 게 있나 찾아봐야겠어. 참! 다음에는 수첩 제일 첫 장에 우리 이름을 적어두자. 특히 아이들 한자는 꼭 적어야 해.” 다음 여행 계획이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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