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읽은 산문집에서 작가는 20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파리로 날아갔다. 그곳을 ‘로망의 종착지’라고 명한 작가는 두 달간 파리에서 살며 글을 썼다고 했다. 빼곡하게 적힌 파리에 대한 찬사를 읽으며, 나의 파리를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엄마는 그냥 파리가 싫은 거야.”
딸아이가 말했다. 세 번째 파리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나는 방금 딸아이에게 파리에는 이상한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분명히 릴에 가면 가벼워질 거라고, 너무 좋을 거라고 했다.
2년 전, 파리에서의 5박 6일을 마치고 피렌체에 도착했을 때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나를 사로잡고 있던 예민함을 벗고 가벼워진 느낌은 파리보다 화창했던 피렌체의 날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파리는 그런 나를 비웃듯 3일 내내 화창했지만, 나는 또다시 도시가 주는 무언지 모를 긴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파리에게 번번이 졌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그 기운을 처음 느낀 건 호기롭게 24박 25일 동안 8개의 도시를 다니는 일정을 계획하고 그 일정의 시작으로 파리에 도착했을 때부터였다. 첫날은 여행 첫날이라서. 둘째 날은 시차에 적응이 안 되어서. 셋째 날은 추워서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이날 오랑주리에서 찍은 내 사진을 보고 곰인 줄 알았다고 했다. 누군가는 샤스커트를 입고 모네의 수련 앞에서 우아하게 사진을 찍을 때, 나는 비니를 뒤집어쓰고 네 겹쯤 껴입어 뚱뚱한 패딩 점퍼 주머니에서 손도 빼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한껏 날이 선 상태로 다섯째 날쯤 되었을 때 나는 여태 파리에서 화창한 하늘을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해가 없어서 그랬네!”
낮게 깔린 회색빛 구름이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내가 상상한 화려하고 반짝이는 파리의 실상은 우울하고 축축했다. 개선문 전망대에서 희뿌연한 샹젤리제 거리를 내려다보며 나는 미세 먼지 ‘매우 나쁨’ 날씨의 남산 타워 전망대를 떠올렸다. 이건 미세 먼지일까, 겨울 유럽 날씨인 걸까. 글자 모양은 익숙하지만 뜻은 전혀 유추할 수 없는 언어 안에서 내가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하는 말도, 한 글자도 읽을 수 없는 언어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일지도 몰랐다. 나는 한없이 작아져 있었다. 일본을 가면 한자가 있었고, 베트남을 가면 영어가 함께 쓰여 있었다. 어째 이 나라는 그런 배려도 없을까.
“난, 너랑 같이 오는 거 아니면 프랑스는 그만 와야겠어.”
딸아이가 고등학교 내내 힘들어했던 프랑스어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 알았을까. 아이의 고생은 결국 내가 좋으려고 그랬나 보다. 사실 미안한 마음 뒤로 뿌듯함이 공존했다. 나도 나를 알 수가 없었다.
이해가 되어야 암기가 가능한 아이였다. 자기가 좋아하는 그리스·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계보는 줄줄 외우면서도 영어단어를 외우는 건 너무 어렵다고 했다. 그런 아이가 외고에 진학했다. 계획된 선택은 아니었다. 학교 안에서 벌어진 문제와 공식적인 중재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부모로서 아이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했다. 일반고보다 빨리 진행되는 외고 입시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그래도 나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면 끝까지 해내는 아이였다.
신기하고, 안쓰럽고, 대견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반장을 해보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당연히 안 될 줄 알고 있었다. 한두 번 떨어지면 그러다 말겠거니 했건만, 이 아이는 2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결국 반장이 될 때까지 출마했다. 그리고 5학년, 6학년 선거에서 당선 소식을 전했다. 나는 인간 승리라고 말했다. 4학년 말 즈음에는 전교 임원이 되고 싶다고 했다. 학교 축제에서 진행을 하는 전교 회장, 부회장 언니를 보더니 자기도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학급 반장에도 당선된 적 없던 아이가 전교 임원이라니. 딸아이는 네 번의 도전 끝에 6학년 2학기에 결국 전교 임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초등학교 마지막 축제에서 진행을 맡았다. 꿈을 꾸고 그 과정과 경험의 가치를 아는 아이였다. 나는 아이의 외고 입시를 위해 면접 기출문제를 분석했고, 아이는 매일 카메라 앞에서 연습했다.
합격의 뿌듯함도 잠시, 아이의 고행이 시작되었다. 6시 50분 셔틀 탑승, 10시 귀가.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삶이었다. 전쟁이 나도 아침밥부터 챙길 아이였기에, 나도 6시부터 아침을 차리고 밤 10시에는 학교 근처를 서성였다. 수시로 학교로 데리러 가는 나의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아이가 기를 쓰고 있는데도, 성적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프랑스어. 외고를 목표로 하는 아이들은 전공 언어도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다는 걸, 우린 입학하고서야 알았다. 결국 3년 내내 프랑스어 점수를 깔아주는 역할은 우리가 맡게 되었고, 아이는 결국 재수를 하고서야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헛된 시간은 없었다. 수시로 만나는 원어민 선생님, 국·영·수에 준하는 프랑스어 시수는 고스란히 아이에게 체화되어 있었다. 그게 프랑스만 가면 여실히 드러났다.
“아니, 근데 우리가 외국인인 줄 알면서 하나같이 프랑스어부터 하냐? 네가 더듬거리기 시작하면 그제야 영어 써도 된다고 허락해 주는 건 뭐냐고”
나는 매일 투덜거렸다. 반면 딸아이는 매일 신이 나 있었다.
“내가 프랑스어를 엄청나게 잘하는 줄 알았나 보지. 근데 엄마, 나 파스칼 선생님한테는 발음 지적 많이 받았는데, 여기 사람들은 다 알아듣네. 내 발음이 아주 별로는 아닌가 봐.”
파리는 딸아이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책을 읽다 보면 분명 읽었던 책인데 그 책이 맞나 싶을 때가 있다. 같은 텍스트라고 해도 나의 상황과 맥락이 달라지면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고 책에 대한 느낌도 달라진다. 이를테면 『데미안』을 읽다가 이 책이 내가 사춘기를 보내며 읽었던 그 책이 맞나 싶던 그런 경험 같은 것 말이다. 사람도 그렇다. 그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른 상황에서 만나면 이런 면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나랑은 절대 안 맞을 줄 알았던 사람에게서, 다른 면을 발견하고 둘도 없는 절친이 되는 일이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사람이라던지, ‘그런’ 책이라고 규정해 놓으면 여지가 없어진다. 『데미안』을 사춘기 소년의 성장기로만 기억하고 다시 읽지 않으면 다른 의미는 영영 발견할 수 없다.
여행지도 그렇다. 단 며칠로 그 도시를 어찌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다시는 내 인생에 파리는 없을 거라며 호언장담하며 떠났건만 다시 돌아오는 데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우중충하고 우울했던 5박 6일간의 파리와는 달리 맑은 하늘 아래 눈부신 햇빛이 반짝였다. 내가 상상하던 파리였다.
“날씨 맑은 것 봐. 내가 겨울 파리는 우중충하다고 소문냈더니 이번에는 3일 내내 해를 보여주네. 다시는 안 오겠다고 큰소리치고 갔는데, 이렇게 금방 또 왔어. 에펠탑아, 잘 지내고 있었구나~”
에펠탑 앞을 지나며 너스레를 떠난 나에게 딸아이가 말했다.
“난 올 줄 알았어. 내가 올 거라고 했잖아.”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며 걸어야 했던 거리가 한산했다. 한산한 거리는 파리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택시 트렁크에 실린 묵직한 짐이 덜컹거렸다. 교환 학교를 선택할 때 결국 프랑스를 택하는 아이를 보며 나는 우리의 지난 여정을 떠올렸다. 6개월 동안 딸아이가 지낼 릴은 파리에서 열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이자 이번 여행의 종착지였다. 짐꾼으로 동행한 나의 임무도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파리에 오게 될까. 아직 에펠탑을 보지 못한 남편을 언젠가 한 번은 데려와야 했다.
“내가 다시 파리에 오게 된다면, 네가 꼭 같이 있어야 해. 여기서는 내가 영 못쓰겠어. 아니다. 그냥 아빠만 보낼까? 네가 같이 다녀줄래?
나는 그렇게 나의 다음 파리를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