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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변 LHS Aug 11. 2020

우리가 겪은 어떤 결말에 관하여

영화 : 마티아스와 막심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세상의 모든 힘듦을 다 짊어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상대방의 존재는 위안이고, 힘이 된다. 그에게는 다른 모든 세상이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기에, 상대방이 끌어 가주는 그 세상만이, 그가 느낄 수 있는 편안한 곳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세상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부족함이 없지만, 어떤 계기로, 상대방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인 욕망을 느낀다. 호숫물을 보면 풍덩 빠져들어 휘저어 나아가고픈 욕망을 느끼듯이, 삭막한 사무실 한켠의 힘없는 식물에 눈이 가듯이, 이성(理性)이 설계해둔 일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상대방을 향한 그 감정에, 그는 열정적으로 빠져든다.


그런 두 사람의 끌림은 전혀 낯설지 않다. 이 영화가 아니라도 수많이 변주된 고전적인 러브스토리의 플롯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는 질문을 던진다. 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 온 사이이고, (중요하진 않지만) 같은 성별이라면, 아주 오랜 시간 (어쩌면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던 어릴 때부터도) 익었을 수도 있는 그 끌림은 우정과 다른 것인가?  마치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다가 영어로 이야기하듯이, 이 끌림을 다른 언어로 부른다면, 그 감정은 두 사람에게 또 다른 어떤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일까?


질문은 어지러이 던져지지만, 현실이 그러하듯 대답은 영화 속에 없다. 그 질문들에 답을 해야 하는 것은 결국 질문을 받은 관객의 몫이고, 관객들은 둘의 감정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그 감정이 무엇인지에 관한, 자신만의 정의를 이리저리 탐색할 테다.


그러던 마지막 순간, 영화는 우리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상처 입히고 또 상처 입어본 기억까지 잔인하게 끄집어 내버린다. 그 상처를 기억하게 하는 마지막 순간, 우리는 그 상처를 외면하거나, 또는 반대로 직시하거나, 혹은 또 다른 각자의 방법으로 기억해낼 테고, 결국 나만의 답이었던 그 감정의 정의를, 다시 또 다른 나만의 방법으로 의심하게 될 테다.


마지막 장면, 관객을 향해 결국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또 그 대답으로 희미한 듯 힘없는 듯 웃어 보이는 또 다른 그의 미소는, 우리가 겪은 어떤 결말을 기억하게 하는가?


그것은 편안하게 남아버린 어떤 애절한 감정일 수도 있겠고, 반대로 가슴을 후벼 파도록 애절하게 남은 어떤 편안한 감정일 수도 있으며, 미안함일 수도 고마움일 수도 아련함일 수도 있을 테니, 영화는 혼란한 감정의 기억에 우리를 가져다 두고 거기서 끝을 맺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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