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피라미드의 건설과정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피라미드가 무임금 노예들을 착취하여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피라미드 주변에서 많은 ‘낙서’들이 발견되면서 그 주장은 뒤집히게 된다.
피라미드의 주변에서 발견된 낙서들에는 ‘월급은 조금 주면서 일 더럽게 많이 시키네’ 하는 불만부터, ‘감독관이랑 싸워서 며칠 안나왔는데, 집에서 마누라가 하도 바가지를 긁어서 다시 일하러 나왔네’ 하는 일상의 이야기까지, 생생한 그때의 삶을 전해주고 있다고 한다. 또 어떤 낙서에는 피라미드 건설 결근 사유로 ‘어제 숙취 때문에’라고도 적혀 있다고 하니, 자칫하면 외국인 역사가에 의해 왜곡될 뻔했던 생생한 이집트 민초들의 역사를, 낙서가 되돌려놓은 것이다.
한국에서도, 한 연구자가 일제강점기 시절의 화장실 낙서를 분석한 일이 있단다. ‘이곳은 이완용 식당임’이라고 적힌 화장실 낙서부터 시작해서, 일왕과 조선 총독을 잘근잘근 씹는 이야기들도 낙서들 중에 많았다고 한다. 뭐니 뭐니 해도 ‘조선독립 만세’라는 메시지는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하니, 이 낙서들 또한, 묻힐 뻔한 한국 민중들의 마음을 드러내 주는 귀중한 자료일 수 있겠다.
특히, 낙서의 역사는 화장실과 떼어놓을 수 없다. 화장실은 인류 역사에서 단순한 신체적인 배설구만이 아니었다. 사방이 막힌 그 내밀한 곳은, 할 수 없는 이야기도 끊임없이 쏟아낼 수 있는 곳이 되어 주었다. 권력과 엄숙함에 대한 전복의 메시지들은, 마치 계속 쏟아내야 하는 배설물들처럼 화장실에서 열심히 쏟아져 나왔다.
학생 때를 돌이켜 봐도, 대학교 도서관은 낙서의 전당이었다. 극단적인 정치적 주장들부터, 온갖 성적인 이야기들까지 (아주 심혈을 기울인 그림들까지 첨부되는 경우들이 많았다.) 낙서가 가득했다. 그래서 대학 도서관의 낙서는 마치, 지성의 전당에 가둬둔 야생의 양식장 같았다.
그런데 21세기의 화장실에서는 낙서가 모조리 사라졌다. 요즈음은 오래된 화장실이 아니면, 낙서로 가득 찬 장소를 찾기도 힘들다. 수만 년 인류 역사 상 유래 없는 일이다.
화장실 낙서가 사라진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이제 화장실에 가서도 정보를 흡입한다는 데 있겠다. 웹툰이건, 정치 기사건, 아니면 유튜브의 유행 영상이건 간에, 하여튼 21세기의 우리는 화장실에 가서도,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낸 정제된 메시지들을 소비한다.
원래 수천 년간 화장실은 신체적 배설과 동시에 응어리진 메시지를 쏟아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21세기의 화장실은, 스마트폰의 세례를 받아, 역사상 최초로 수많은 정보를 소비할 수 있는 공간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전복의 메시지는 더 이상 화장실에서는 쏟아져 나오지 않는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지금은 화장실보다 더 쉽게 익명성의 뒤에서 메시지를 배설할 수 있는,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사상의 배설은 이제 화장실이 아닌 곳에서도, 우리 손 안의 휴대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가능해진 것이다. 휴대폰이 화장실 변기보다 더럽다는 연구결과는 단순히 그곳에 묻은 세균 수의 문제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
화장실이라는 배설의 공간은, 새로워진 수세식 화장실만큼이나 깔끔한, 우리의 손안에 있는 작은 기계로 옮겨진 듯하다.
하지만, 화장실에서의 작은 전복과 자유가 가져다주는 것과 달리, 이 작은 휴대폰 안에서의 메시지들은 왜 이리 시원하지 않은 것인가? 화장실에서는 권력자와 시스템에 대해 비난이 가득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데, 이 작은 기계에서는 왜 소수자나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혐오의 발언들이 더 부각되는 것일까?
장애인 시위에 대한 악플이 크게 증가했다는 이야기를 보며, 그 낙서들이 남긴 우리의 모습은 훗날 어떻게 회고될지를 생각해 보았다. 차라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화장실 낙서의 시절이 아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