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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변 LHS Sep 30. 2021

살인범도 변호할 수 있으세요?

변호사에게 궁금할 수 있는 것들


"살인범도 변호할 수 있으세요?"


지금은 외국은행에 소속된 사내변호사로 일하고 있지만, 나는 형사변호사로서 변호사 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나에게 위의 질문을 자주 물어본다. 아마도, 그런 질문의 이면에는 '변호사는 돈만 준다면 부도덕한 범죄자들을 비호해주기까지 한다.'는, 여러 매체에서 즐겁게 소비된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묘한 호기심이 있을 테다.


그런 질문을 들으면, 생각나는 사건이 하나 있다.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첫 해, 나는 한 정치인의 변호를 맡은 적이 있다. 중견기업체 여러 개를 가족들과 함께 운영하던 그 정치인은, 한 회사의 자금을 빼다가 다른 회사의 계좌로 무단 이체하며, 두회사의 자금 운영을 마음대로 했다는 횡령죄로 기소가 되었다. 1심에서 이미 그는 유죄의 판결을 받아 수감되어 있었고, 가족들은 2심의 변호사를 찾던 중에 내가 일하던 로펌에 찾아왔던 것이었다.


나도 기업체를 운영하는 정치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지, 처음 사건의 개요를 들었을 때, 그 정치인의 행동은 위법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최대한 양형에서 유리하게 변론하는 것이 전략상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감중인 피고인을 대신한 가족들과 회사 직원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듣다 보니,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사실, 그 피고인이 한 회사의 자금을 다른 회사의 계좌로 이체한 것은, 두 회사가 당좌계좌를 하나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해당 회사가 가지고 있는 당좌 채무를 제대로 갚기 위해서, 다른 회사 명의로 개설되어 있던 당좌계좌로 자금을 이체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해당 정치인은 검찰 수사에서 그 내용을 뭉개어 잘 전달하지 못하고, '억울하다'는 이야기만 계속하였고, 그 바람에 기소되어 1심에서 유죄판결까지 받았던 것이다. (그는 당시의 정권과 맞지 않은 성향의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정권으로부터 음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런 것이 검찰 기소에 영향을 미쳤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나는 밤을 새워 2만 페이지에 달하는 증거들을 새로 검토하였다. 그리고 해당 거래와 관련된 당좌 거래내역, 어음 내역을 찾아내고, 이 사건에 적용할 수 있는 유사한 대법원의 판결까지 찾아내었다.


결국 그 정치인은 해당 횡령 혐의에 대해 무죄를 받고 2심에서 석방되었다. 1심에서 실형 선고를 받고 구속상태에서 재판받던 피고인이 2심에서 무죄를 받고 풀려나는 것은 드문 일이었던지라, 지방 뉴스와 우리 로펌에서도 꽤 화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살인범도 변호할 수 있으세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예를 들어 그 살인범이, 한국어를 못하거나 한국어 표현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어눌하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말을 한국어로 옮기는 통역사가 필요하듯이, 변호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의 말을 최소한 불리하지 않게 법적으로 통역하여 수사기관이나 법정에 옮기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물론 뻔한 증거들에도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고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본인의 과오를 덮으려는 것 같은 뻔뻔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래 보이는 사람들이라도, 자세히 들어보면, 본인의 억울한 감정에만 집중하다가 정작 본인이 집중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사실은 법적인 용어로 정리해서 이야기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최소한 범죄의 이유를 들어봤을 때 양형사유로라도 참작될만한 이야기들을 놓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죄를 지었다면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죄를 지었다고 비난받는 사람이라도, 그들의 이야기들을, 최소한 누군가는 법적인 용어로 검찰과 법원에 불리하지 않도록 통역해 줄 필요가 있죠. 그런 의미에서 살인범에게도 변호인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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