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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Dec 30. 2022

이사님 이사하던 날

이야기로 엮는 리더십



그날은 조 이사님 댁이 이사하는 날이었다.

단독주택에서 살다가 해수욕장 옆에 새로 조성된 대단지 아파트로 이사를 하는 것이었는데, 요즘처럼 포장이사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라서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와 도왔다.. 라기보다는 혹시라도 혼자 빠졌다가는 찍힐 수도 있어 반강제적으로 얼굴을 보였다.


직원들은 일요일 아침 일찍 이사님이 먼저 살던 단독주택에 모여 트럭에 이삿짐을 실었고, 바로 새로 이사하는 아파트로 달려 다시 이삿짐을 풀었다.


시간은 어느덧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고, 직원들은 일요일에 집에서 아침밥도 제대로 못 먹고 나온지라, 조 이사 사모님이 주는 박카스와 초코파이 하나로는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하고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이사하는 날은 무엇보다도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는 게 그날의 백미가 아니겠는!

당연히 조 이사는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켰고, 직원들은 거실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땀을 흘려가면서 열심히 일한 만큼 아주 맛있게 배를 채웠다.

두들 배부르게 식사를 한 다음 서비스로 온 콜라를 한잔씩 하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포만감에 젖어 있는데...


"자~ 이제 한판 해야지?"

조 이사는 거실 한쪽에는 화투를 그리고 반대쪽에는 카드를 풀었다. 이사하는 날은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하게 방바닥을 두들겨야 집에 복이 들고 잘 산다고 하였다던가?


조 이사는 그렇게 고스톱판과 훌라판을 벌여놓고 마치 하우스장이라도 된 듯 한판이 끝날 때마다 이긴 사람한테서 천 원삥을 뜯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중국집에서 시켜 먹은 음식값을 계산하였다.


회사에서 직원들이 잔업하면서 군만두 추가로 시켜 먹었다고, 외근 나가서 택시비 많이 다고 직원들을 닦달하시던 양반이, 알고 보니 진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의 구두쇠였던 것이다. 

세상에 자기 집 이사 도우러 온 직원들 밥값을 충당하려고 삥을 뜯다니...


"어때? 우리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갈래? 저녁엔 팔보채 하고 양장피도 시키고..."

조 이사의 한마디에 직원들은 황망해하며, 집에 일이 있다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는 명절 때 부하직원들이 이사님 댁이나 전무님 댁을 방문하던 문화가 있었다.

돈 씀씀이가 후한 임원들은 찾아오는 직원들에게 식사를 대접함은 물론 선물에 세뱃돈까지 챙겨 주는 분도 있었다.


"우리는 서양식이라 명절을 안 쇠어서..."

조 이사는 명절에 찾아오는 직원들에게 딱 커피 한잔이 다였다.

직원들도 거기서 밥을 먹었다가는 밥값을 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고, 아예 오전 10시쯤 방문해서 인사만 드리고 이내 전무님 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무는 성격이 아주 호방하고 재산도 좀 가진 분이었는데, 직원들에게 용돈을 나누어 주고 그걸로 밑천 삼아 고스톱이나 훌라를 치게 하였다.

그러다 보니 전무님 댁에는 찾아오는 직원들도 많아 점심시간 조, 저녁시간 조로 나누어 분산하여 오도록 하였고, 음식도 넉넉하게 장만하여 직원들에게 푸짐하게 식사대접을 하였다.



조 이사가 젖소를 키운다며 강원도 산골로 떠난 후, 박 이사란 분이 후임으로 왔다.


새로 온 박 이사는 씀씀이가 컸다. 직원들이 잔업하며 군만두 추가로 시켜 먹었다고 뭐라고 하기는커녕 일한다고 고생하면서 탕수육도 안 시켰다고 뭐라고 할 정도였다.

당연히 명절 때 방문하는 직원들에게도 한없이 잘해주었고, 직원들은 점심은 이사님 댁에서, 저녁은 전무님 댁에서 먹는 일정으로 즐겁고 배부른 하루를 보내곤 하였다.


"전무님 댁에서는 저녁에 무슨 음식을 준비한다고 하던고?"

"점심때 박 이사 집에서 뭐 먹었노?"

나중에는 이사전무 사이에.. 누가 직원들에게 더 맛있고 푸짐한 식사를 대접하나.. 경쟁이 붙을 정도로 직원들은 호사를 누렸다.




이사에게도 한 가지 문제는 있었다.

회사에 경비지출에 대한 지침이 있었는데 그게 박 이사한테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어떤 부서장은 좀 깐깐하고 어떤 부서장은 또 후해서, 잔업을 할 때 누구는 짜장면 먹으며 일하고 누구는 탕수육 먹으며 일한다면 회사 내 형평성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잔업식대 '₩3,500/인', 이렇게 지출되는 비용항목에 대해서 지출 지침을 마련해 놓았는데, 박 이사는 그 가이드라인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사내 경조사에 자기 명의로 지출하는 경조금까지 회사돈으로 처리하였고, 심지어는 명절 때 직원들에게 대접한 음식 재료값도 모두 회사 경비로 지출하였다. 멋모르고 식사한 직원들 마저 부지불식간에 공범이 되고만 것이었다.


앞의 조 이사는 '회사돈도 내 돈처럼 아껴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비지출 지침에도 못 미칠 정도로 직원들의 희생을 강요한 반면, 박 이사는 '내 돈은 내 돈이고 회사돈도 내 돈이다'라는 생각으로 회사돈을 펑펑 써버린 것이다.


큰 대기업에서는 예산제도를 운영하고 있어서 부서별 비용지출을 깐깐하게 통제하고 또 감사부서에서 주기적으로 감사를 실시하여 규정에 맞는지를 확인하지만, J기업은 그만한 관리 수준이나 조직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직원들의 불평불만을 한 몸에 받던 조 이사는 쉽게 모습이 드러났지만, 직원들에게 잘해주었던 박 이사는 그러한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박 이사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회사돈을 마음대로 펑펑 써댔고, 직원들은 그 밑에서 콩고물을 주워 먹으며 잘 지냈다.



옛날엔 결혼하면 회사 동료들 초대하여 집들이도 하고, 집에서 아이 돌잔치도 하고, 명절 때 직장 상사 집에도 찾아가고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문화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봄, 가을엔 관광버스 빌려 단체로 야유회도 가고, 체육관 빌려 체육대회도 하고, 여름엔 회사에서 빌려 둔 해수욕장 하계휴양소에서 같이 해수욕도 즐겼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이벤트도 없어져 버렸다.
'너는 너, 나는 나, 회사는 회사' 그냥 삭막한 공간에서 실낱같은 건조한 관계가 이어질 뿐이다.
그래서 가끔은 동료들과 끈적하게 부대끼기도 하고 누군가의 집에서 밤늦도록 방바닥을 두들기기도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 이 글은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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