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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Feb 22. 2023

트로트가 뭐길래



머리가 지저분해서 동네 미용실을 찾았다.

젊어서부터 머리를 짧게 깎다 보니까 완전 습관이 돼서, 이제는 좀 길러야지 하면서도 끝내 못 참고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이발을 하는 편이다.


허름한 동네의 평범한 미용실이다 보니까 나이 지긋한 아줌마들이 몇 분 계셨는데, 그 틈에 남자 혼자 꿋꿋하게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젊었을 때는 멋쩍어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인데, 나이 들면서 얼굴 표피도 두꺼워지고 남성 호르몬도 줄어서인지, 아줌마들 틈에 끼어 있어도 뭐 크게 불편함느끼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줌마들도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라서 편하게 앉아 있었다.


머리에 펌 롤을 다 말고 수건을 고 계시는 분, 막 자리에 앉아 롤을 말고 계시는 분, 염색을 마치고 기다리시는 분 등 다양한 아줌마들이 계셨는데, 중요한 건 한결같이 TV 화면에 몰두다는 것이었다.

TV에는 요즘 한참 진행 중인 A종편채널의 '*터트롯2'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는데, 아줌마들 모두 출연자의 노래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러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을 수밖에!



TV를 시청하는 중간중간에 아줌마들의 입에서는 '*훈 정말 노래 잘하더라' '김용* 참 멋지더라' '박*현은 어디서 밀어준다더라' 등등 출연자들노래 감상평에서 인물평과 숨겨진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급기야 아줌마들의 화제는 다른 B종편채널에서 방송하고 있는 '불타는트롯*'으로 넘어가, 또 거기 출연자들의 면면이며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끝없는 이야기의 향연이 펼쳐졌다.


평범해 보이는 아줌마들이 어떻게 그렇게 출연자 한 명 한 명에 대한 노래실력과 외모 그리고 숨겨진 스토리까지 알고 있는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도 트로트 시험이 있다면 모두들 거의 만점을 지 않을까 싶었다.




요즘 트로트 경연 프로가 뜨겁다.

원조격인 A종편채널의 시리즈 2탄과, A종편채널에서 트로트 경연의 붐을 이끈 PD가 B종편채널로 건너가 거의 맞불을 놓는 형국으로 시작한 프로가, 화요일과 목요일에 번갈아 방송되면서 더욱 열기를 더하고 있다.

물론 시리즈물의 특성상 예전의 피크치가 꺾여 종전의 시청률은 안 나온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여전히 트로트의 인기가 뜨겁다.


요즘 토로트 경연 프로 우승자들의 출연료가 그 어느 가수보다 높다고 하니, 그것만 보아도 트로트의 인기가 높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오죽하면 유명대학교 출신의 성악가, 유명 뮤지컬 가수, 톱클래스의 아이돌에다 국악인까지 트로트를 하겠다고 나섰겠는가!



그동안 TV 음악방송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십 대 이십 대 젊은이들의 점유물이었다.

리듬과 템포가 어찌나 빠른지 분명히 한국말인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고, 게다가 중간중간 영어마저 섞이면 마치 외계어를 듣는듯한 묘한 환에 빠졌었다.

나같이 나이 든 사람은 최소한 '노래는 가슴으로 듣는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슨 말인지 가사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음악방송은 아예 없는 것이나 한 가지였다.


그러다 트로트 경연 방송을 마주하니, 귀로는 가사가 쏙쏙 들어오고 노래하는 출연자의 숨결이며 감정까지 그대로 느껴지는 게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그냥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이게 가슴으로 듣는 노래지!


게다가 출연자 한 명 한 명마다 어찌나 노래를 그렇게도 잘 부르는지, 모두가 우승 후보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단지 그날의 컨디션이나 선곡의 호불호에 따라 생기는 미세한 차이에 의해 승패가 갈리는 것 같았다.


출연자노래 부르기 전에 짤막하게 보여주는 스토리도 한층 더 그 가수에게 집중하게 만들어 재미를 더했다.


'저를 키워주신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꼭 이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아나운서를 트로트에 운명을 걸겠습니다.'




"그런데, 언니 조카는 어떻게 되었어요?"

"어.. 최종본선 15인에 올라갔다. 인기투표 좀 해줘라!"

"어머 그래요? 잘됐네요!"


미용실 손님이 미용사인 사장님한테 물었고 사장님이 대답하였다.


'*터트롯2'에 출연한 가수 '나*도'가 미용실 사장님 조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친근감 가는 외모에 노래도 구수하고 깔끔하게 잘 불러 예전부터 눈여겨봐 오던 가수였다.


"그래요? 그러면 인기투표를 해드려야죠!"

하면서 미용실 손님 모두 핸드폰을 열어 꾹꾹꾹 눌러주었다.


'나*도'는 예명이라고 했다.

나훈아의 '나', 박상철의 '상', 설운도의 '도'를 각각 따와서 지었다고 하니, 얼마나 트로트 가수로 성공하기를 바랐는지 그 간절한 마음을 이해할만했다. 부디 이번주에도 성공하여 결승까지 가기를 응원해 본다.



나*도 가수가 노래할 때마다 펑펑 운 심사위원 현영은 이렇게 말했다.

"우린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나 봐요. 혹시.. 아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하.하.하! 모두들 배꼽 빠지게 웃었다.



현영이 9살 더 연상이다



* 이 글은 특정 가수를 홍보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관련하여 미용실에서 어떤 추가 서비스도 받은 사실이 없음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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