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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그릇 싸움의 승자

그때는 말이쥐~ #4

by 이은호



1970년대에 전국적으로 쥐 잡기 행사가 있었고 학교에 쥐꼬리와 잡은 파리를 제출했다는 글에 의문을 품는 분들이 계셔서, 혹시 제 기억이 잘못되었나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파리는 조그만 성냥갑에 300마리가 들어간다는 통계도 나와 있고, 저는 기억에 없는데 '쥐는 살찌고 사람은 굶는다' '쥐는 가족계획이 없다'는 구호까지 었다고 하네요.^^


당시 전국적으로 생산되는 곡물의 10%를 쥐들이 먹어치웠고, 마릿수가 1억 5천만 마리로 우리나라 인구의 4배가 넘었다고 하니, 과연 쥐들 세상이 맞았나 봅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70년대 초는 경제적으로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그전에는 더했겠지만 내 기억에 없으므로 모르겠고, 어쨌든 내가 어린 시절엔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것도 힘들었다.

하루 두 끼를 먹는 게 예사였는데 그나마도 한 끼는 수제비나 국수, 시래기를 넣은 콩비지 등으로 때워야 했다.



그렇게 먹을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쥐들은 도대체 뭘 먹고 사는지 구석구석에서 나타났다.

인간도 잡식성, 쥐도 잡식성으로 식성이 비슷하다 보니, 결국 인간과 쥐 사이에 밥그릇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쥐들은 한술 더 떠서 인간이 먹지 못하는 것에도 눈독을 들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비누였다.


집 앞마당에 수도시설이 있어서 거기서 빨래도 하고, 몸도 씻고, 설거지도 하였는데, 세면대에 놓여있는 비누통이 바로 놈들의 주 타깃이었다.

비누통에는 하얀색 빨랫비누와 진분홍 빨간색의 세숫비누가 들어 있었는데, 도 이쁜 건 아는지 빨랫비누는 놔두고 세숫비누만 물고 갔다.


세숫비누에는 '뿌니비누'란 상표가 붙어 있었는데, 진한 장미향이 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쥐가 색깔로 구별하는지, 향으로 구별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아침에 세수하려다 보면 비누가 없어서 한참을 찾다 쥐구멍 앞에서 갉아먹다 남는 비누토막을 발견하곤 했다.

먹을 것도 없던 시절, 비누 조각도 아까운 상황이라 버릴 수가 없어서 물로 몇 번 헹구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쥐가 가져가는 비누를 사 대기가 힘들어 비누곽을 높은 장독 위에 올려놓아도, 쥐란 놈은 낮은 장독부터 몇 번을 건너뛰어 올라가 비누곽을 밀어 떨어뜨리고, 바닥에 떨어진 비누를 물고 갔다.

확실히 쥐란 놈은 보통 영악한 게 아니었다.



동방예의지국의 양반 자손으로 뼈대 있는 가문에서 자란 우리는 세수를 안 하고 나돌아 다니는 거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지라, 허리띠를 졸라매고 세숫비누를 사 대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차라리 그 돈으로 쥐 밥을 대주는 게 나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랬다면 최소한 쥐들이 갉아먹다 남은 비누조각으로 세수하는 일은 없었을 아닌가.--;




집쥐들은 자기가 사는 집을 자기 집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자기들이 사는 집에 인간들이 기생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쥐는 밥그릇 싸움뿐만 아니라 보금자리 쟁탈전까지 벌여야 했다.



쥐한테 먹을 것을 뺏기는 것도 모자라 보금자리까지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 보이는 대로 놈들을 잡아 족칠 수밖에 없었다.

집쥐는 한번 맘먹고 싹 잡아들이고 나면 한동안.. 보통 6개월 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이웃에 사는 쥐들이 번식하여 숫자가 늘게 되면 분가하여 빈집으로 이사를 했다.

가만히 보면 사람과 마찬가지로 쥐들도 생김새가 제각각 달라 전에 살던 쥐인지 새로 온 쥐인지 다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쥐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에 살던 인간인지 새로 이사 온 인간인지...


눈에 익었다고 해서 결코 서로 간에 정이 가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쥐들이 보이면 보이는 족족 다시 잡아 족치곤 하였다.



쥐를 잡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약을 놓거나 덫을 치거나 고양이를 기르거나 등인데, 그중에서 덫을 치는 게 최고였다.


약을 놓으면 개나 고양이 등 다른 가축이 먹을 염려도 있고, 쥐가 먹고 나서 엉뚱한 곳에 가서 죽으면 나중에 썩는 냄새가 진동할 염려도 있었다.

고양이를 기르면 사는데 돈도 들고, 먹이 값도 들고, 밤에 시끄러워 잠을 못 자는 불편함도 있었다.

반면에 쥐 덫은 단점이 거의 없었고, 재사용이 가능하고 게다가 사냥하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이렇게 덫으로 잡은 쥐는 연탄집게로 머리통을 사정없이 내리쳐서 죽이든지, 재미를 좀 더 보려면 덫 채로 물속에 집어넣어 익사시키는 방법이 있었다.


추천하는 방법은 연탄집게로 사정없이 머리를 내리쳐 한방에 죽이는 것인데, 이 방법이 쥐한테도 고통을 줄이고 후환을 없애는 방법이기도 했다.

익사시키는 방법은.. 사실 쥐란 놈이 생명이 질겨.. 죽은 줄 알고 덫에서 내어 놓았다가 놓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였다.


이렇게 도망친 쥐는 반드시 인간에게 복수를 하였다.

당시 대다수 집은 연탄아궁이가 있었고, 연탄불로 밥도 해 먹고 온돌방을 덥혀 난방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도망친 쥐는 복수심에 불타 눈을 빨갛게 물들이고, 온 구들장을 파헤쳐 여기저기 쥐구멍을 뚫어 놓아 결국 연탄가스로 사람들을 황천길로 보냈다.



쥐를 잡을 때는 조금도 인정사정 두지 말고, 그야말로 '쥐새끼 때려잡듯' 해야 다.

그래야 생존이 걸린 밥그릇 싸움, 보금자리 쟁탈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누장사의 노림수


나는 6~70년대에 비누장사를 했었다.

당시는 경제적으로 정말 어려운 시기여서, 보통 서민들의 경우 하루 세끼 밥을 먹기도 힘든 마당에 비누장사가 잘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주라고는 비누 만드는 것 밖에 없어서 꾸역꾸역 장사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가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뭐가 눈앞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려 살펴보니, 글쎄 생쥐 한 마리가 비누를 물고 가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아침 쥐구멍 앞에서 발견된, 반쯤 먹다 남은 쥐 이빨 자국이 빼곡히 난 비누조각을 보고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좋은 묘수가 떠올랐던 것이다.^^*



일단 쥐덫을 놓아 쥐 몇 마리를 생포하였다. 그리고 그놈들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내가 착안한 아이디어는 바로 '약물'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생포한 쥐들의 먹이로 진분홍 빨간색의 세숫비누인 '예뿌니비누'를 주었다.

거기에 동물용 식욕증가제와 발정제 약물을 적당량 섞었고, 진한 장미향으로 위장하였다.


며칠 후 효과는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쥐들이 몸집이 커짐과 동시에 시도 때도 없이 수놈이 암놈한테 달려들었다. 암놈도 적극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번식력이 높은 쥐들에게 먹을 것이 생기고 할(?) 욕망까지 끓어오르자, 그 숫자가 머지않아 백여 마리로 불어났다.


난 그놈들을 쥐구멍 몇 곳에 풀어주었고, 한동안 장미향이 나는 예뿌니비누를 먹이로 제공하였다.



몇 달이 지났고 내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예뿌니비누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품귀현상까지 일어 생산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몰려와 선불로 돈을 맡기고 갔다.


엄청난 숫자로 불어난 쥐가 온 동네를 헤집고 돌아다니며 예뿌니비누를 물어가는 바람에, 사람들은 비누 사 대기에 바빴다.


예뿌니비누가 경쟁사 신제품 '밍크비누'와 '다이알비누'에 밀릴 때까지 나는 제법 큰돈을 벌었다.


당시 이런 말이 회자되었다.

'재주는 쥐가 넘고 돈은 비누장사가 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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