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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Apr 12. 2023

롤러스케이트는 사연을 싣고

롤러장의 추억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면서 학교 수업은 점점 정리 단계에 들어갔다.

상업고등학교의 특성상 취업이 목표였으므로 수업 진도를 나가는 것보다는 각자 취업에 필요한 준비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들 중에는 확고한 사명감을 갖고 굳이 교과서 진도를 빼시는 선생님도 계셨지만, 많은 선생님들이 자습 시간을 주어서 스스로 필요한 공부를 알아서 하도록 배려를 해주셨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나자 친구들이 한두 명씩 취업이 확정되어 실습을 나가면서 교실에 빈자리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빈자리가 늘어감에 따라 정상적인 학급 운영이 힘들어지게 되었다.

이윽고 교실을 취업확정반, 미취업반으로 나누어 운영하게 되었고, 취업이 확정된 아이들은 취업확정반에서 수업대신 자습을 하면서 대학진학 등 자기에게 필요한 공부를 알아서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취업의 방향을 금융기관보다는 기업체 쪽으로 고 있었는데, 2학기가 시작되자 마침 동창회장님께서 운영하는 회사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공고가 붙었다.

동창회장님은 매년 성적이 우수한 후배들을 장학생으로 채용하여 근무를 시키면서 대학교를 보내 주셨다. 물론 학자금도 전액 지원해 주셨다.

돈을 벌면서 대학교도 갈 수 있는 내가 딱 원했던 길이었다. 마침 학교 성적도 지원 조건을 충족하고 있어서 그 회사에 지원하였다.


당시 동창회장님은 그 회사의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는 물러나 계셨고 2세가 실질적인 경영을 있었는데, 후배들의 면접은 명예회장님께서 직접 보셨다.

회장실로 안내된 우리는 잔뜩 긴장을 하고 회장님을 뵈었는데, 회장님께서는 지원자들의 간단한 자기소개만 받으신 후 별다른 질문도 없이 그냥 한 명 한 명 찬찬히 살펴보시는 것으로 끝내셨다. 

인상만 봐도 안다는 뜻이셨는지는 모르겠는데, 말 그대로 면접(面接).. 얼굴 확인 셈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 합격통지를 받았다.

그때가 9월 중순이었는데 출근일은 다음 해 1월 1일이라고 했다. 그동안은 대학입시를 위한 공부에 전념하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해서 그 회사에 입사가 확정된 친구들은 모두 취업확정반으로 갔고, 거기서 입시공부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당시 12.12 사태 이후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교육정상화의 일환이라며 '재학생 입시학원 수강 금지'라는 희한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즉, 입시학원은 재수생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상고의 특성상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비하여 대학입시에 많이 불리하였고, 특히 수학과목은 학교에서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아 학원수강이 불가피했는데 그 길마저 막혀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없이 주로 암기과목 위주로 스스로 공부하여 점수를 따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의 생활이 갑자기 재미가 없어졌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특활반 활동을 하면서 재밌게 지냈는데, 하루종일 책만 보고 있으려니 보통 좀이 쑤시는 게 아니었다.

이러다 '학교 졸업하기도 전에 말라죽겠다' 싶었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일탈을 꿈꿨던 게 바로 롤러장이었다.


당시 롤러스케이트가 유행을 했었는데, 린다 블레어가 나오는 '롤러 부기'라는 영화가 기름을 부었다.

전국의 수많은 공터에 롤러스케이트장이 우수죽순으로 생겼고, 시내에는 규모가 큰 대형 롤러장이 생겨났다. 젊은 청춘남녀들이 반짝이는 조명아래 쿵쾅거리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씽씽 내달렸다.


평일에는 교복 차림의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여학생 남학생 할 것 없이 빽빽하게 모여들었고, 주말에는 사복으로 무장하고 몰려들었다.

특히 여학생들은 원색의 티셔츠에 핫팬츠로 몸매를 한껏 드러내고 입술도 빨갛게 물들이고 나타났다. 그도 그럴 것이 남녀가 한데 어우러져 만날만한 장소가 많지 않았던 시절에, 롤러장만큼 남자애들에게 어필하기 좋은 장소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 교복 속에 꽁꽁 싸매어 두었던 매력맘껏 발산하 것인지도 몰랐다.




학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대형 실내 롤러장이 생겼다.

바닥이 나무마루로 되어 있어서 시멘트 바닥으로 되어 있는 보통의 롤러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롤러가 구르면서 지면과 마찰되는 감촉이 너무 좋았다.

내부 시설도 멋졌고 색색으로 반짝이는 조명에 천장 가운데에는 커다란 사이키 조명이 두 개나 달려있었다.

음악도 빵빵하게 흘러나와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기분을 내는 데는 그야말로 최고의 조건이었다.


나와 죽이 맞는 몇몇 친구들은 자습시간 중에 슬그머니 학교를 빠져나와 롤러장으로 향했다.

정문을 지키는 수위 아저씨께는 선생님 심부름을 간다고 둘러대고 당당하게 정문을 통과하였다.

학도호국단 간부에다가 모범생인 우리를 보고 수위 아저씨는 설마 놀러 나간다고는 추호도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한 시간씩 사용료를 내고 발에 맞는 롤러스케이트를 빌렸다.

교복 윗도리를 벗고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언뜻 보아서 땡땡이치는 학생같이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비스듬히 대각선으로 왼발 오른발을 번갈아 밀면서 앞으로 나갔다. 롤러와 바닥과의 마찰을 느끼며 스피드를 서서히 붙여 나갔다.

코너를 돌 때는 스케이트 선수들이 코너링하는 동작과 마찬가지로, 왼발이 바깥쪽으로 미끄러짐과 동시에 오른발을 왼발의 안쪽으로 옮겨 딛는 동작으로 왼발 오른발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고 나갔다.


쿵쾅거리는 음악소리가 귓전을 울렸고 벽면의 그림과 반짝반짝 조명이 빠르게 지나갔다.

얏호! 세상에 이렇게 신나는 또 있을까?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머리를 잡고 끙끙대던 입시공부 스트레스가 롤러장을 단 몇 바퀴만 돌면 말끔히 해소되었다.



롤러장에 예쁘장하고 늘씬한 여자애가 한 명 있었다.

그 아이는 롤러스케이트를 아주 잘 타서 앞으로는 물론 뒤로도 타고 다리를 벌려 옆으로도 탔다.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팅을 하듯 한 발로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며 롤러스케이트를 탔다.

우리들이 보기에는 거의 여신급이었다.


나이는 우리 또래인데 학교를 안 다니는지 낮에도 늘 롤러장에 붙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이를 '죽순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아이는 거기서 언제든지 공짜로 롤러스케이트를 수 있었고, 사장으로부터 약간의 용돈까지 받고 있었다.

소위 말해서 '어장관리' 자원이었던 것이었다.


나이트클럽 같은데도 '어디 물 좋다!'라고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몰리듯이, 롤러장도 경쟁이 심했다.

그래서 롤러장마다 예쁜 여자애들이나 멋있는 남자애들을 한두 명 두었고, 그 아이들이 멋지게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보고 일반 학생들이 몰려들게 끔 상술을 펼쳤다.

그리고 그 아이들로 하여금 잘 못 타는 아이들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손도 잡아 주면서 고객관리를 하게 했다.




롤러스케이트를 배우면 처음에는 앞으로 가는데 집중하고, 조금 숙달되면 속도를 줄여 부자연스럽게 코너를 돌고, 조금 더 숙달되면 속도를 유지하며 부드럽게 코너를 돌게 된다.

그다음으로 익혀야 하는 게 롤러스케이트를 뒤로 타는 것이다.

앞으로 가다가 180° 회전을 해서 돌아서서 뒤로 가면서 발을 지그재그로 저어 추진력을 얻어서 계속 뒤로 타는 것인데 이게 참 어렵다.


롤러장의 바깥쪽으로는 아이들이 빠른 속도로 크게 원을 그리며 돌고, 가운데는 초보자들이 롤러스케이트를 배우거나, 회전 또는 뒤로 타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연습을 다.


나는 거의 매일 땡땡이치며 학교를 빠져나와 롤러장을 다녔기 때문에 스피드를 내는 것은 물론 코너링도 능숙하게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뒤로 타는 방법을 배울 차례였고 롤러장 가운데에서 혼자 어렵게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좀 잡아줄까?"

죽순이가 나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사실 그 애를 롤러장에서 매일 보았지만 그때까지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친구들과 먼발치에서 보며 '와~ 멋있다!'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 애가 나에게 말을 걸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손 이리 줘봐!"

그 애가 내 양손을 덥석 잡더니 양발을 지그재그로 틀며 뒤로 슬슬 미끄러져 갔고, 나는 두 손을 잡힌 채 앞으로 줄줄줄 끌려갔다.

"뒤로 타는 건 두 발을 교대로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그 아이가 설명을 하면서 시범을 보였고, 나는 그 아이의 발보다는 바로 눈앞에 있는 얼굴을 쳐다보면서 '어.. 어..' 건성으로 대답하였다.

그 아이의 크고 까만 눈과 양쪽 광대 쪽에 콕콕 박혀있는 주근깨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의 분홍색 입술이 계속 열렸다 닫혔다 하며 뭐라고 뭐라고 말을 했는데, 잘 들리지 않고 그냥 윙윙거리며 내 귀를 울렸다.


그다음 날 롤러장에 갔을 때 그 아이가 나를 보고 밝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 아이로부터 거의 일주일 동안 매일 뒤로 타는 요령을 배웠다. 앞으로 타다 스피드가 적당히 붙으면 180° 회전을 하면서 그 추진력을 싣고 양발을 놀리며 뒤로 타고 방향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는 아이들이 크게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롤러장의 바깥쪽에서, 물론 스피드는 떨어지지만 같이 원을 그리며 뒤로 탈 수 있는 정도까지 실력이 늘었다.

'아 이러다가 롤러스케이트 선수를 해도 되겠는걸!'

스스로 기쁜 마음에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롤러스케이트를 뒤로 는 건 색다른 묘미가 있었다.

앞으로 탈 땐 앞사람의 꽁무니만 쫓게 되는데 뒤로 타면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부러워하는 시선을 느끼면서 기분이 업되어 롤러스케이트를 즐길 수 있었다.

아무튼 입시공부보다는 롤러스케이트가 훨씬 미있었다.



학교에 중간고사 시험기간이 되었다.

3학년 2학기 때 교과서 진도는 제대로 나가지 않았지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시험은 쳤다.

2학기 성적을 내야 했기 때문인데, 이게 상당히 중요하였다.

대학입시에 3학년 때 성적을 기준으로 한 내신성적 30점이 반영되었는데, 학력고사의 거의 10%에 해당하는 점수로 절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취업을 나간 애들은 취업증명서를 발급받아 1학기 성적을 그대로 적용받을 수 있었지만, 나같이 취업확정반에 있는 아이들은 중간고사를 반드시 치러야 했다. 그리고 대학진학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잘 쳐야 했다.

그랬기 때문에 롤러장 생각이 간절했지만 꾹 참고 중간고사 시험공부를 해야만 했다. 중간중간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신나게 달리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지만 머리를 흔들어 떨쳐버리고 공부를 하였다.


그렇게 중간고사 시험을 다 치른 날 종례를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롤러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보이지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롤러스케이트를 내어주는 직원한테 물어보니 이제 안 나온다고 했다.

서울인가 어디 다른 롤러장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마음 한쪽이 서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뭐 사귀었던 사이도 아니고 그냥 손만 몇 번 잡았을 뿐이고, 것도 롤러스케이트를 가르쳐준다고...


그 아이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났다.



가을이 되고 교정에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떨어졌다. 휑한 운동장으로 찬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여미게 만들었다.

이제 학력고사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한가하게 롤러스케이트나 탈 때가 아니었다.

만일 입시에 실패라도 한다면 무슨 낯으로 동창회장님을 뵐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고개를 들고 회사를 다닐 수 있을 것인가?

장학금이고 뭐고 다 날아갈 판이었다.

그때부터 다른 거 다 잊고 입시공부에만 매달렸다.


 아~ 좋은 시절 다 갔다.

 고3 청춘의 끝자락이여!

 가슴이 시렸다.

 가슴 한복판으로

 찬바람이 휑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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