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하천변 산책로에는 사시사철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자주 그 길을 걷는데 눈에 비치는 풍경이 참 다채롭다. 한 번씩 쓰는 내 일상글의 원천이기도 한 고마운 길이다. 그러나 딱 하나 불만이 있다. 가끔은 혼자 사색에 잠겨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걷고 싶을 때가 있는데 이 길에선 도무지 그런 기회가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꽃 피는 봄날이나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는 하천변 공터에 행사가 열려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게 아니더라도 평일 농구장에는 농구하는 젊은이들이, 다리밑에는 바둑 두는 어르신들이 늘 북적인다. 젊은이들만 버스킹을 하는 줄 알았는데, 어디 동호회인지 중장년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른다. 강아지 데리고 산책하기에도 제격이라 각양각색의 강아지들도 산책을 즐긴다. 물속에는 잔잔한 치어부터 팔뚝만 한 월척까지 바글바글하고 그 위에는 호시탐탐 먹이를 노리는 오리나 왜가리들이 진을 치고 있다. 오리와 왜가리는 먹이를 잡는 방법이 다른데, 왜가리는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흐르는 물속을 노려보다가 원샷 원킬을 노리고, 오리는 끊임없이 자맥질을 하며 물고기 뒤를 쫓는다. 비둘기들은 길가에 떼를 지어 기어 다니며 씨앗, 나뭇가지 부스러기, 흙 알갱이 가리지 않고 보이는 대로 주워 먹는다. 그리고 무거워진 속을 비우기 위해 공중에서 폭탄을 투하해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기도 한다. 완전 묻지 마 폭력이 따로 없다.
운동기구가 설치된 곳에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여들어 헛둘헛둘부터 하드 트레이닝까지 밤낮이 없다. 젊은 청년들이 웃통 벗고 울끈불끈 근육자랑 숏폼을 찍기도 한다. 배드민턴 코트에서는 낮에는 배드민턴, 해가 지면 아주머니들의 라인댄스가 이어진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경쾌한 음악소리에 이어 오와 열 질서 정연하게 줄 맞춰 리듬을 타는 아주머니들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옆으로 느릿느릿 구르는 할아버지 자전거와 그 옆을 미친 듯이 씽씽 달리는 사이클. 둘이 타고 날아가듯 휙 지나가는 전동 킥보드는 보기에도 아슬아슬하다. 가끔 웃통 벗고 자전거 어깨에 메고 가는 아저씨도 있고 또 아주 가끔 레미콘 윗부분이 다리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웃픈 사고가 생기기도 한다.
이러니 도무지 조용히 사색하며 걸을 수 있는 분위가 아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나갔다가도 번번이 실패를 하고 만다. 지난번에는 비 오는 날, 우중에 작은 우산 쓰고 분위기 잡으려다 실패한 적도 있었다. 이 하천변 산책로에는 도무지 감성이라는 게 없다.
지난주 퇴직한 회사의 퇴직임원 모임에 참석하였다. 비가 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송년모임이라 그런지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하셨다. 왕년에 한가닥씩 하셨던 선배님들은 여전히 왕성한 기력에 고기도 많이 드시고 술도 많이 드시고 말씀들도 정말 많이 하셨다. 웃고 떠들고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 왕성한 기력을 평소에 참고 지내시다가 한 달에 한번 이렇게 모여 서로서로 풀어내시니 얼마나 하고픈 말씀들이 많을까 싶었다.
긴 시간 동안 고기 먹고 식사하고 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하고 나니 드디어 마칠 시간이 되었다.얼마 남지 않은 올 한 해 무탈하게 보내고 내년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걸 기약하며 헤어졌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렸고, 우산을 받쳐 들고 집으로 가기 위해 전철역으로 향했다. 식당에서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에 섞여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귓가에 윙윙 맴도는 듯했다. 그런데 불현듯 우리 동네 하천변 산책로가 생각났다. 이렇게 비 오는 밤, 그 길도 호젓하겠지?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과 모임을 하다 보면 어떤 만남은 그 뒤끝까지 깔끔해서 헤어지고 나서도 입가에 미소가 잡히는 경우가 있고, 어떤 만남은 분명히 같이 있는 시간에는 좋았는데 헤어지고 나서는 마음 한 모퉁이가 텅 빈 듯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날이 그랬다. 비가 와서 일수도 있고 시끄러운 모임뒤에 갑자기 찾아온 고요가 낯설어서 일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날따라 빗속을 혼자 걷고 싶었고 그 하천변 산책로가 생각났던 것이다.
중간에 하천변과 인접한 전철역에서 내려 하천변으로 내려갔다. 다행히도 비가 잦아들어 많이 가늘어져 있었다. 하천변 출입을 통제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난여름 갑자기 불어난 빗물에 사람이 실종된 적도 있어서 잠시 망설여지기도 했으나 물길을 보니 한참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건 짐작대로 사람이 없었다. 정말 시야에 한 사람도 보이질 않았다. 아! 드디어 소원을 푸는구나 싶었다.
삼십 년 넘게 다니던 회사를 퇴직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년이 흘렀다. 세월 참 빠르다. 그 수년동안 뭘 했던가? 지금 인생 2막을 제대로 살고 있기는 한 걸까? 하고 싶었던 글 쓴다고 노트북 앞에는 앉아 있지만 정신은 온통 허공을 휘젓다 안드로메다로 빠지고. 돈도 안 되는 글 쓰기에 이렇게 시간을 소비하는 게 맞는가 싶은 생각도 들고, 이게 진짜로 내가 원했던 일인가 싶기도 하다. 차라리 글쓰기 대신 자격증 공부를 해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게 낫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한편으로는 이제 아이들 다 커서 딸 아들 모두 결혼하여 제 갈길 가고 아내와 둘이 남았으니, 크게 돈 들어갈 일도 없고 둘이만 건강하면 되는데 돈에 욕심을 버리자 싶기도 하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게 그 시간만큼은 돈 들어갈 일이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남들 따라 골프 치러 다니고 해외여행 다니고 그러다 보면 차도 삐까번쩍 외제차를 타야 광이 날 거고, 골프채도 마제스티 프레스티지오나 혼마 5스타 정도는 휘둘러야 폼이 날 텐데 그게 감당이 되겠나? 작가라는 허울이 좋아서 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르고 아무리 후줄근한 옷을 입어도 '작가갬성'이라고 다 커버가 되니 외모에 신경을 안 써도 되고 돈도 안 들고 이 얼마나 좋은가말이다.
글을 쓰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지만 꼭 기획출판이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지원금을 받아 책을 낼 수 있고, 공모전에서 상금을 받을 수도 있고, 차곡차곡 경력이 쌓이면 또 다른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 이제 작가 일년차인데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내년엔 공모전에 참여하여 실전 경험도 쌓고, 지역 문인협회도 가입하며 활동반경을 넓혀 보자. 그리고 따스한 봄이 되면 어의도 섬에 홀로 터를 잡고 있는 친구한테도 가봐야지. 거기에 또 그럴듯한 스토리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산다는 게 다, 다... 엥?!
♪~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
한참 사색에 잠겨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걸음을 옮길수록 노랫소리는 커졌고 눈앞에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아, 바로 아주머니들의 라인댄스! 비 오는 날, 비를 피해 다리밑에서 밤늦은 시간에 열정을 불태우는 아주머니들. 십여분의 아주머니들이 다리밑에서 스텝, 스으텝을 밟고 계셨다.
♪~ 아모르파티
아모르파티 ♪♬~
아아, 라인댄스와의 조우는 정녕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도저히 말릴 수 없는 우리 동네 하천변 산책로. 오늘도 모처럼 끓어오른 감성이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흑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