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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Apr 18. 2022

빵 이야기


오븐에서 빵을 구울 때 은은하게 퍼지는 구수한 냄새가 좋다.


햇살이 따사로운 날 느긋하게 창가에 앉아 따끈한 커피 한잔과 갓 구운 빵 한 조각으로 소소한 행복감느껴본다.


아메리카노가 아닌 그냥 믹스커피라.. 마침 생크림 남은 게 있어 빵에 바를 수 있으면 그걸로 하다.




현직에서 은퇴하고 칠팔 개월 정도 제과제빵학원엘 다녔다.


제과제빵 기능사자격반 수업을 들었는데.. 나 같이 나이 든 남자는 없고 대부분 이십 대 초중반 아가씨들이었고 가끔은 고등학생들도 있었다.


한 반에 수강생이 스무 명 정도 되었는데 서너 명씩 한 조가 되어 실습을 하였다.

나이 많은 나로서는 젊은 친구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도록 언행을 조심하고 설거지 같이 귀찮은 일은 먼저 나서서 부지런을 떨곤 하였다.


빵을 만들 .. 설거지나 청소거리나 정리정돈 해야 할 것들이 정말 많이 나온다.

처음엔 이런 것들이 무척 낯설고 어색하였는데 몇 달을 비슷한 일을 반복하다 보니 이력이 붙어서 아주 도사가 다 되었다.

덕분에 집에서도 설거지를 자주 하는데.. 아내의 주문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미리 알아서 하는 편이다.


제과와 제빵의 차이는 크게 이스트라는 효모를 사용하느냐 안 하느냐로 구분한다.


식빵 바게트빵 단팥빵 같은 제빵은 이스트를 써서 발효과정을 거쳐 반죽을 부풀리는 것이고.. 케익류 파이류 과자류 등 제과는 베이킹파우더라는 화학적 팽창제를 쓰거나 유지층 또는 계란거품(머랭)을 이용하여 반죽을 부풀린다.


제과제빵 수업을 들으면서 느낀 점은 빵 만드는 게 상당히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홈런볼 과자 같은 슈(chou) 반죽은 뜨거운 물로 살짝 볶아가며 익반죽을 하는데.. 나중에 오븐에서 크게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보면 정말 신기하였다.


초보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품목 중 하나가 페이스트리인데.. 밀가루 반죽과 유지층을 겹겹이 쌓아 오븐에서 유지의 힘으로 부풀리는 빵이다.

이른바 '3절접기'라는 반죽 유지층을 243 만들어내는 과정이 지난하고도 고된 과정이다.

때문에 페이스트리를 제대로 만들 줄 알면 '빵 좀 만들어 봤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품목들이 레시피를 어느 정도 흉내 내면 아무리 초보자라 하더라도 제법 그럴듯한 모양과 맛의 결과물이 만들어져 나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내가 빵 만들기에 도전한 이유는.. 뭔가 직접 내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서였다.


30여 년 직장생활을 하면서 관리직으로 맨날 치다꺼리만 하다 보니까.. 구체적인 결과물이 없는 관리라는 게 싫증이 났고 뭔가 작은 거라도 직접 이루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아니면 학창 시절 친구들과 빵집에 둘러앉아 한입 베어 물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던 단팥빵의 달콤함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제과제빵 수업을 듣고 나서 바리스타 수업도 들었다.


커피라는 게 또 오묘해서 똑같은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똑같은 원두일정한 양의 커피를 추출하는데..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다르다.

원두의 로스팅 상태에 따라 달라짐은 물론 그날의 날씨나 습도에 따라서도 미세한 차이가 난다고 한다.


바리스타 수업 중 어렵고도 재미있었던 것은 스팀으로 우유를 따끈하게 거품 내어 카페라떼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는데.. 거품의 두께를  0.5cm 이상 유지하며 하트 모양을 그려내는 작업이 꽤나 까다로웠다.

매일 1,000ml 흰 우유 한통씩을 써가며 하트를 그리고 또 그렸다.


선생님의 라떼아트 시범


빵 만들고 커피 뽑는 일이 재미있어서 내친김에 아예 직업으로 삼아 디저트 카페 같은 것을 차려까 하는 욕심이 생겨.. 디저트 수업을 추가로 들었다.


실제로 매장에서 바로 판매할  있는 레시피로 구성된 20개 품목의 디저트 메뉴를 배우는 고급과정이었다.

제과제빵 기초과정을 수강해서 그런지 수업은 어려움 없이 재미가 있었고 소수 정예 수업으로 세세한 부분까지 알게 되어 아주 좋았다.


그중에서 뉴욕치즈케익 파운드케익 마들렌 스콘 티라미수 등은 맛도 괜찮았고 충분히 매장에서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붙을 정도였다.


그렇게 학원에서의 수업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준비를 할 무렵 코로나19라는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맞게 되었고.. 아쉽게도 끝내 매장을 열지는 못하였다.




지금은 빵 만들기가 직업이 아닌 취미로 남았지만 나름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다.


아내가 모임에 나갈 때 가끔 빵을 만들어 준다. 선물용으로는 파운드케익이 그런대로 제격이어서.. 레몬 유자 시나몬 크림치즈 단호박 등 갈 때마다 종류를 달리해서 건네주면 아내는 기꺼이 들고나간다.

나중에 맛있게 잘 먹었다는 인사 한마디만 들으면 나는 기쁘다.

그래서 신이 나 또 만들게 되고 아내는 또 기꺼이 들고나간다.



내가 지인들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빵 하나로 전해지는 정을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들이 고맙고.. 그저 맛있게 먹어주는 것만으로 뿌듯함을 느낀다.


빵 만들기가 좋은 점은 주변의 젊은 사람들과 대화하기가 편하다는 것이다.

나이 먹어 젊은이들과의 대화가 공통된 이야깃거리도 없어 자칫하면 잔소리만 늘어놓을 수도 있고 괜한 꼰대의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는데.. 직접 만든 빵을 건네며 시작하는 대화는 확실히 거리감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빵 만드는 취미생활에 한 달에 10만 원 정도의 재료비가 들어가는데 이 정도 투자로 얻는 것을 생각하면 투자효율이 정말 높은 편이다.


그동안 홈베이킹을 하면서 맨날 똑같은 것만 만드는 것은 아니고.. 꾸준히 베이킹 관련 책도 보면서 나름대로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베이킹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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