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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Jun 27. 2022

우울증이 주는 선물

그 남자의 책 이야기


내가 아는 어떤 선배는 일 중독자였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일 중독자라기보다는 사무실 중독자였다. 퇴근시간이 지나도 꼼짝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남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 밤늦도록 홀로 남아 있는 게 예사였다. 그렇다고 일이 바빠 야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무실에 남아 책을 보는 것이었다. 그의 책상엔 대하소설이 수십 권 쌓여 있었고 그는 거의 중독자처럼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경비원 말에 따르면 저녁식사도 제때 챙겨 먹지 않는 것 같고 가끔씩은 사무실에서 꼬박 밤을 지새운다고 하였다. 직장 상사는 그런 선배가 걱정되기는 하였지만 해야 할 일을 늘 깔끔하게 처리하여 업무능력을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밤늦도록 사무실에 남아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사건이 터졌다. 선배의 아내가 어린 아들을 목졸라 살해하고 칼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아파트 계단에 피를 흘리며 쪼그려 앉아있는 것을 마침 이웃주민이 발견하여 119에 신고하고 병원으로 이송해 살렸다고 한다. 그 선배의 아내는 몇 년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결국은 자식과 함께 동반자살을 기도했다는 게 경찰의 수사결과였다.


돌이켜보면 선배의 아내뿐만 아니라 그 선배도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집에 가지 않고 혼자 사무실에 남아 책을 보는 게 그 선배의 도피처였던 것이다.




임상심리학자 라라 호노스 웹은 자신의 저서 '우울증이 주는 선물'에서 우울증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궤도를 벗어났을 때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라고 한다. 거기서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한번 되돌아보라는.


리는 차 안에 파리 한 마리가 있다. 그놈은 탈출하려고 윙윙거리며 한쪽 창문에 계속 몸을 부딪혀가날아다닌다. 그런데 그 반대쪽 창문은 열려있다. 파리가 한 번쯤 날던 것을 멈추고 뒤돌아 본다면 쉽게 탈출할 수 있을 것인데 오직 앞만 보고 전진이다. 몸이 부서져라.


우울증은 잘 사는 나라 선진국에서 더 많이 발생하는데 미국의 경우 성인 여성의 20%, 성인 남성의 10% 정도가 우울증을 경험한다고 한다. 여성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이유는 사회적 차별과 호르몬의 차이, 임신에 따른 심리적 생리적인 부담, 육아, 직장과 가정에서 져야 하는 과중한 역할 등 다양하다.


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 중 15% 정도가 자살로 이어진다고 한다. 만일 그런 생각을 갖고 진지하게 계획을 세우고 유서를 남기고 유품을 어떻게 할지와 같은 구체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전문가의 도움이 긴급하게 필요한 단계이다.


우울증의 주요 증상들로는 불면증, 수면과다, 피로감, 에너지 상실, 무가치감 등이 있는데, 이러한 증상들이 오히려 삶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증상들이 나타날 때 무조건 회피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되짚어 보고 건강한 삶과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여정을 이끌어 내라는 것이다.


때로는 우울증의 회피 수단으로 과식, 과로, 음주, 약물 등이 이용될 수 있는데, 이들은 우울증의 치료는 고사하고 '우울증과 비만' '우울증과 일 중독증' '우울증과 약물남용' 등 복합적인 문제를 만들어 낼 뿐이다.


따라서 무조건 피하기보다는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이 현재의 나의 상태가 정상적인 항로에서 벗어났음을 알려주는 '신호'인지하고 그 자리에 멈춰서 자기 성찰을 통하여 바른 길을 찾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나의 삶에서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고칠 수 있을까?'


'고통에 대한 유일한 탈출구는 회피가 아니라 그것을 통과하는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숙련된 여행 가이드처럼 우울증의 유형 및 주요 증상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우울증이 주는 선물을 하나씩 하나씩 발견하여 자신의 삶을 재창조하는 여정으로 독자를 안내하고 있다.




남자도 나이가 들면 갱년기를 경험한다고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종의 우울증이 아닌가 싶다.


30여 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바쁘게 앞만 보고 살다가 막상 퇴직을 하고 나니 뭔가 허전하고 허탈하고 기운이 빠지고 가끔씩은 마음이 울적해지는 감정이 들기도 한다. 뭔가를 의욕적으로 하려고 하다가도 '에이 이런 걸 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에 그만두기도 한다.


나의 삶에도 경고등이 켜진 건 아닐까? 이제 한 번쯤 멈춰서 되돌아보라는.


얼마 전 자영업을 접으면서 아내로부터 퇴직금(?) 200만 원을 받았다. 어디 잠시라도 머리 좀 식히고 오라고 한다. 아마도 휴식이 필요한 시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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