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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Sep 20. 2022

약으로 산다


얼마 전 위 대장 내시경을 포함한 건강검진을 받았다.


검진 전날 속을 비우기 위해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게 번거로워서 그렇지 내시경 검사 자체는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위는 4년 만에 대장은 6년 만에 받는 건데.. 이상이 없으면 이상이 없어서 다행이고.. 뭐라도 나오면 그나마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 때문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앞서서 걱정하지 말자는 게 내 지론이다. 특히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일수록 더 그렇다.


"대장에 용종이 발견되면 작은 것은 간단하게 제거하면 되지만 큰 것은 제거 시술을 해야 하고 이때 출혈 천공 괴사 등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거 시술을 하는 경우에는 떼어낸 자리에 클립을 끼워 출혈을 멈추게 하고 오후 5시까지 병원에 링거를 맞고 있으면서 이상이 없는지 관찰해야 합니다. 이상이 없으면 댁으로 가셨다가 내일 아침 병원에 오셔서 복부 X-Lay를 찍고 이상 유무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물론 그때까지 물 한 모금도 드시면 안 되고요."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내시경 검사에 대한 무시무시한 엄포를 듣고도 순한 양처럼 순순히 확인서에 사인을 해주었다. 이제 이 한몸 선생님 뜻대로 하소서.


미리 손등에 꽃아 둔 주삿바늘을 통하여 수면유도제가 투입되고 '이제부터는 내 몸이 내 것이 아닌겨' 하는 순간에 낯선 방에서 눈을 떴다. 이미 내시경 검사가 끝난 것이다. 살펴보니 다행히 몸에 링거가 꽂혀있지 않았다. 큰 용종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대장에 작은 용종 두 개를 제거했는데 신경 쓸 정도는 아니고요 위에는 염증이 좀 있네요. 일단 일주일치 위장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 약 다 드시고 오시면 전체 건강검진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우선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내시경 검진 소견을 들었다. '오랜만에 검사를 받았는데 뭐 그 정도쯤이야' 하고 생각하며 발걸음도 가볍게 병원 문을 나섰다.




일주일 동안 위장약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먹었고 좋아하는 맥주를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병원을 다시 찾았다.


"간수치가 높은데 술을 많이 드십니까?"


"아뇨, 일주일에 맥주 두어 번 마시는데요. 한두 캔 정도로요."


"이건 술을 많이 드실 때나 나오는 수치인데 혹시 최근에 한약을 드셨나요?"


"아뇨."


"그럼 특별하게 드시는 약은요?"


"없는데요."


"홍삼이나 그런 것도 안 드세요?"


"루테인을 먹는데요."


"그건 관계없구요."


의사 선생님은 어떻게든 엮어보려고 거의 용의자 취조하는 수준으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셨고, 나는 최대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가급적 말을 아꼈다.


", 그렇군요. 그리고 LDL 콜레스테롤 수치가 상당히 높게 나왔습니다."


선생님은 결국 간수치에 대한 원인 규명은 포기하고 화제를 혈관 쪽으로 돌렸다.


"혈압도 있으시니까 콜레스테롤 약을 드셔야겠는데요. 그리고 생선 알, 고기 내장, 계란 노른자, 오징어, 새우, 햄, 버터, 과자, 케익 등의  음식은 피하십시오."


의사 선생님은 피해야 하는 음식과 먹어도 되는 음식이 나열된 인쇄물을 건네주시며 자상하게 일러 주셨다. 내장탕, 알탕, 오징어 구이, 새우튀김을 먹지 말라고? 내가 좋아하는 것 다 먹지 말라면 도대체 뭘 먹고살라는 거지 싶었다.


"지난번에 치료하였던 헬리코박터균은 없어졌고요.. 앞으로 대장 내시경은 5년 후, 위 내시경은 위염이 있으시니 2년 후에 검진을 받으십시오."


"예."


"위장약, 간장약, 고지혈증약 각각 한달치를 처방해 드릴테니 드시고요.. 원래 두 달은 드셔야 하는데 한달치를 드리니까 꼬박꼬박 챙겨 드셔야 합니다."


"예. 그런데 선생님 한 열흘 전부터 왼쪽 옆구리 뒷부분이 뻐근한 느낌이 드는데 건 왜 그럴까요?"


"장기는 오른쪽에 대부분 위치해 있지 왼쪽에는 별게 없습니다."


"아... 예에~"


내 옆구리 이상증세에 대한 호소는 그렇게 무시되고, 의사 선생님과의 면담을 마친 후 처방전을 들고 병원을 나와 근처 약국으로 향했다.


 "오늘은 약 처방이 많이 나왔네요. 이거는 아침 식전에 드시고.. 이거랑 이거랑 이거는 아침과 저녁 식후에 드시고.. 이거랑 이거는 아침 식후에 한 번만 드시면 됩니다."


"예? 뭐라고요?"


"여기 병뚜껑에 적어 놓았으니 잘 보시고 드시면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약국에서 정말 묵직할 정도로 많이 챙겨주는 약 보따리를 들고 나왔다.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먹지 말라는 식품 설명을 들을 때 앞으로 뭘 먹고살지 걱정했는데, 약국을 나서면서 약 보따리를 보니 약만 먹어도 배부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던 것이다.




어느덧 60년을 사용하고 나니 이곳저곳 탈이 나고 있다.


하기야 뜨겁고 매운걸 좋아하는 내가 위가 정상일리가 없고, 각종 가공음식에서 나오는 독소며 환경호르몬에 적잖게 노출되는 현대사회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간수치며 콜레스테롤수치 등 이상신호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작년 혈액검사에서는 간수치는 정상이었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그렇게 높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눈도 침침하고 치아도 시원찮고 다리에 힘도 빠지고 몸에 성한 곳이 한 곳도 없는 것 같다. 이런 부실한 몸으로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


건강검진 결과를 고 온 그날 저녁 햄이며 소시지며 가공육류가 잔뜩 든 부대찌개를 맛있게 먹었다. 맥주도 한잔 겻들여서.


"그래 이맛이지! 약도 받았겠다 맛있게 먹고 약 먹으면 되는 거지 뭐."


어떻게든 약으로 버티면서 가늘고 길게 살아봐야겠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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