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은 바다로 흐르고
철든 여자 철없는 남자 #18
- 철든 여자 -
장석 씨의 병간호를.. 아니 그와 그의 여동생 병간호를 한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고생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엄마를 도와 자청한 식당 일에 젖은 손 마를 날이 없다가, 가정부나 다름없는 생활에 겨우 용돈 조금 얻어 쓰다가, 이제는 팔자에 없는 간병인 노릇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것도 둘씩이나, 무보수로. 애고 내 팔자야!
그가 입원한 다음날 시골에서 그의 부모님이 올라오셨다. 오누이가 나란히는 아니지만, 한 병원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하셨다. 그리고는 부친은 애들만 올려보내 놓고 뒷바라지 못한다며 모친을 나무랐고, 모친은 돈을 제대로 못 버니까 애들까지 고생시킨다며 부친을 원망하였다. 급기야 아픈 아들딸 앞에서 말다툼을 벌였고, 나중에는 불똥이 옆으로 튀어 아들딸한테 끝도 없는 잔소리로 이어졌다. 장석 씨와 그의 여동생은 아픈 몸으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번갈아가며 그 잔소리를 감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에겐 그의 부모님한테 잘 보일 좋은 기회였다. 며칠 계시는 동안, 정말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내 정성에 무척 고마워하셨다. 사실 내 엄마가 입원했다고 이 정도까지 하겠는가?
며칠 후 농사일 때문에 도저히 안 되겠다며 그의 부모님이 내려가셨다. 어머니께서는 내 손을 꼭 잡으시고는 색시가 있으니까 믿고 내려간다고 하셨고, 아버님께서는 조용히 나를 불러 뼈 붙는 데는 잘 먹는 게 최고라며 두툼한 봉투를 건네주시며 잘 부탁한다고 하셨다. 난 그 자리에서 봉투 속에 얼마나 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걱정 마시라고 했다.
열흘쯤 지나자 그와 그의 동생은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휘젓고 다녔다. 그냥 따로따로 있을 때는 별로 못 느꼈는데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니까, 아픈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마구마구 웃음이 나왔다. 오누이가 똑 같이 한쪽 팔과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는 꼴이 바로 '깁스가족'이었던 것이다.
집안일을 후다닥 해치우고 병원을 가기 위해 나서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가 한 마디 했다.
"엉덩이가 시퍼렇게 멍든 년이 어딜 그렇게 싸돌아 다니냐? 집안일은 뒷전이고 언제 철들래?"
지난번 엄마와 같이 목욕탕엘 가서 들키고 말았다. 엉덩이뿐만 아니라 이곳저곳에 타박상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몸조차 돌보지 않고 깁스가족에 온 정성을 쏟았다.
아참!
한 가지 이야기가 빠졌는데, 김경석 그 사람이 장석 씨 여동생 주연 씨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데 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철없는 남자라고 하지만 애가 둘이나 딸린 유부남이 어린 여자와 놀아나다니.
내가 모든 걸 모르는 체 덮어둘 테니, 그래도 옛일을 생각해서 아량을 베푼 것이다. 조용히 떠나라고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다. 웬일인지 그는 순순히 그러마고 물러났다. 그래도 조금의 양심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이제야 정신이 들었던지.
주연 씨한테는 그 남자 나쁜 사람이라고, 건달이라고,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녀는 '남자는 돈만 많으면 되는 게 아니냐?'고 했다. 정말 한심했다. 아무리 날라리라고 하지만 저렇게 철이 없어서야!
하지만 한편으론 철없는 그녀가 가엾단 생각이 들었다. 살다 보면 돈이 다가 아니라고, 필요 이상의 돈은 오히려 행복의 장애물이라고, 얼마 살지 않는 내가 동갑인 그녀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그녀는 결코 이해하는 표정이 아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잠자코 있었다. 내가 없으면 화장실 가기도 쉽지 않은 불쌍한 처지였으므로...
- 철없는 남자 -
요즘 나는 정상적인, 어떤 게 정상적인지는 잘 모르지만 남들이 얘기하는 생활로 돌아왔다. 아내도 몸조리 다 끝내고 두 아들과 함께 돌아왔다. 당근 내가 처가에 가서 싣고 왔다. 사위 왔다고, 그동안 혼자 고생하느라 얼굴이 반쪽 됐다고, 씨암탉 잡으며 환대하시는 장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둘째 녀석은 생김새가 훤칠한 게 아무래도 날 닮은 것 같다. 이제 갓 백일이 된 쪼그만 게 품에 안겨 쌔근쌔근 자는 모습을 보노라면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내쉬는 숨에 섞여 나오는 젖비린내가 달콤하다. 한밤중에 밥 달라고, 기저귀 갈아달라고, 빽빽 울어댈 때는 성가시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사랑의 결정체라는 생각을 하면 애틋한 감정이 솟는다. 이상하다. 이제 내가 아빠가 되는 건가?
아직 잠자리를 피하는 게 좋다고 하는데, 한밤중에 달라붙는 아내의 아랫배를 만져보고 난 깜짝 놀랐다. 둘째가 빠져나간 아내의 축 처진 배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래도 임신 중에는 탱탱하기나 했는데 말이다.
못난 나한테 시집와서 애 둘씩이나 낳는다고 폭삭 늙어버린 아내가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캠퍼스에선 뭇 남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그녀였는데. 그런 아내를 두고 엉뚱한데 정신이 팔려 놀러 다닌 내가 한심한 놈이었다. 난 미안한 마음에 아내를 꼭 안아주었다. 아내도 내 어깨를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아내의 처진 배가 우릴 가로막는다. 슬프다.
오장석의 장기 결근으로 업무에 공백이 생겼다. 겸사겸사 해서 내가 요즘 열심히 일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워낙에 놀고먹는 데에만 열중해서인지 내가 생각해도 뭐 제대로 아는 게 없다. 일한답시고 사고만 치는 나에게 다들 그런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젠 식구도 늘고 나도 정신을 차려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친구인 사장이 그런다. 너 변했다고,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위험하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도 난, 열심히 사고를 치고 있다.
아참! 한 가지 이야기가 빠졌는데, 임지혜 그녀! 그런 장소만 아니었다면 어떻게 해보고 싶을 만큼 그녀는 많이 예뻤고 세련되어 있었다. 이런이런 정신 차렸다는 내가...
지난번 주연이의 병실에서 지혜를 만난 후, 난 그 병원에 발길을 끊었다. 만일 나와 주연이와의 사이를 장석이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 넘이 직장상사고 나발이고, 선배고 나발이고, 개판을 칠지도 모른다. 윽!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여튼 개망신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난 주연이와의 유일한 연락수단이었던 핸드폰 번호를 바꿔버렸다. 그녀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녀의 쭉쭉빵빵한 몸매에 아쉬움도 남았지만, 일단 내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이 김경석이가 이렇게 약해지다니! 이렇게 찌그러져서 살아야 할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