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날에
철든 여자 철없는 남자 #19(최종회)
- 철든 여자 -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꽃피는 봄이 오고, 유난히 장맛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여름이 지나고, 은행잎이 여전히 노랗게 떨어지는 가을이 지나고 또다시 겨울이 왔다.
그리고 또 한 해가 바뀌고, 꽃 피고 새 우는 따뜻한 봄날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가 누구냐고? 당근 장석 씨와 나 말이다. 그날 나는 너무도 어여쁜 공주님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장담컨대 나같이 예쁘고 맘씨 착하고 현명한 여자를 아내로 맞은 장석 씨는 행운아임에 틀림없다.
지난 시간 오랫동안의 병원생활이 그와 나를 굳게 이어준 것 같다. 그와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도망갈 데가 없었으므로 싫으나 좋으나 나와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진실된 면을 읽을 수가 있었다. 비록 외모는 그저 그랬지만, 진실로 나만을 사랑해주고 나만을 아껴줄 남자라는 확신이 들었다. 누구처럼 한눈팔지 않고 말이다.
여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보다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게 행복한 거라고 누가 그랬던가? 물론 둘 다 서로 사랑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바엔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는 게 훨씬 맘고생이 덜하다는 것이다. 맞는 말인 거 같다. 그런 현실을 깨달은 난, 철든 여자이다.
요즘 나는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다. 역시 선택을 잘한 거 같다. 그이는 나에게 아주 잘해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해 안부를 묻고, 일찍일찍 퇴근해서 가사도 거들어준다. 오랜 세월 동생과 자취를 해서인지 실력도 제법 쓸만하다. 하지만 깨 볶는 우리 둘 사이에 가끔은 함께 사는 아가씨가 걸린다. 그렇지만 다 내 복이려니 하고 산다. 열이면 열 다 맘에 들 수는 없는 거니까.
아가씨는 요즘 많이 조신해졌다. 아직 날라리 끼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녀는 머리도 녹슬고 늦은 감도 있지만 대학엘 간다고 요즘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학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돌아와 집에서 또 공부를 한다. 대부분은 꾸벅꾸벅 졸기만 하지만. 자기 말로는 여태까지 놀았던 거 지금 다 갚아야 한다며 열심히 한단다. 어쩌면 그 머리로도 내년엔 대학엘 갈 것 같다.
살다 보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내가 비록 길지 않은 세월을 살았지만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선택을 잘한 거 같다. 그리고 앞으로도 열심히 살면 선택의 기로에서 올바른 길을 찾을 것이라 믿는다.
지금 내 뱃속엔 이제 막 작은 생명이 자리를 잡았다. 그이와 나의 사랑의 결정체인 것이다. 당분간은 아이를 위해서 맨날맨날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음식만 먹고, 좋은 책만 읽고, 좋은 음악만 듣고, 그렇게 살 것이다.
창을 통해.. 초여름의 조금은 뜨거운 햇살이 거실 안까지 비추고 있다. 창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한결 기분을 상쾌하게 해 준다. 향긋한 커피 한잔을, 아니 아이를 위해 커피는 삼가해야지, 따끈한 대추차 한 잔을 들고 밖을 내다본다.
놀이터에.. 아이들 여럿이 웃고 뛰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자애 한 명이 뛰어가다 넘어진다. 그 뒤를 쫓던 남자애 한 명이 얼른 뛰어와 여자애를 일으켜 준다. 그리곤 옷에 묻은 모래를 털어 준다. 둘이 마주 보고 웃으며 손잡고 걸어간다.
그 위로 햇살이 따사로이 내리쬐며 따라가고 있다.
- 철없는 남자 -
해가 두 번 바뀌고, 꽃 피고 새 우는 따뜻한 봄날이 왔다. 날씨 화창한 4월 어느 날 임지혜와 오장석이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난 그들 앞에 떳떳이 나설 수가 없었다. 비록 그들을 맺어준 사람은 나였지만. 다만 먼발치에서 둘의 행복을 빌어주고 서둘러 식장을 빠져나왔다.
요즘 나는 개업 준비로 무척 바쁘다. 웬 개업이냐고? 우리 동네 시장에 꽤 유명한 브랜드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름 있는 스포츠용품 대리점을 열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인생을 착실히 살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적성에도 맞지 않고 실력도 안 받쳐주는 직장생활을 청산한 지는 반년쯤 되었다. 사실 사장인 친구 백으로 그 회사에 자리 잡고 앉아 많은 사람들한테 민폐를 끼쳤다. 회사 분위기 흐리고. 내가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사장도 좋아하는 눈치였다. 다른 직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장은 회사가 어려웠을 때 내가 대준 종잣돈이 한몫했다면서 적잖은 돈으로 돌려주었다. 나는 잘 몰랐지만 녀석이 실력은 있어서 회사를 제법 크게 키웠던 모양이었다.
나는 아버지한테 빌린 돈을 제법 두둑하게 이자까지 얹어서 갚아드릴 수 있었다. 최악의 사태까지 각오하셨을 아버지로서는 뜻밖이었을 것이다. 내민 예금통장 잔고를 확인하면서 입이 거의 귀밑에 걸리셨다. 아버지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시며, 역시 아들 하나는 잘 두었다고 칭찬하셨다.
"내가 누군데요? 아버지 어머니 아들인걸요!"
하고 빙긋 웃어 주었다.
요즘 나는 둘째 키우는 재미에 폭 빠져있다. 한창 천방지축 뒤뚱거리며 거의 날아다니는 아이는 잠시라도 눈을 떼면 안 된다. 한술 한술 밥 먹이기, 같이 놀아주기, 목욕시키기, 모두가 나에게는 즐거운 것들이다. 아내도 흥얼거리며 재밌어하는 내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기뻐한다. 요즘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런 나날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런 아내를 다독이며 걱정 말라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진짜로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했다.
살다 보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내가 비록 길지 않은 세월을 살았지만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선택을 잘한 거 같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지 않고 남들에게 피해를 주며 산데 비하면 행운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그런 행운이 계속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앞으로 열심히 살다 보면 선택의 기로에서 올바른 길을 찾으리라 믿는다.
창을 통해.. 조금은 뜨거운 햇살이 거실 안까지 비추고 있다. 창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향긋한 모카커피 한 모금을 입에 물고 밖을 내다본다.
얼마 전에 집을 아파트로 옮겼다.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에 아이들 여럿이 웃고 뛰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자애가 뛰어가다 넘어진다. 그 뒤를 쫓던 남자애가 얼른 뛰어와 여자애를 일으켜 준다. 그 남자애는 내 아들 녀석이다. 녀석이 제 아빠를 닮아서 벌써부터 여자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여자애를 일으켜주고는 옷에 묻은 모래를 털어 준다. 둘이 마주 보고 웃으며 손잡고 걸어온다. 아마도 여자애와 함께 집으로 오려는 모양이다.
그 위로 햇살이 따사로이 내리쬐며 따라오고 있다.
<끝>
* 긴 이야기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