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면 내 딸은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꺼진 TV화면을 전면거울삼아 밤에 비춰주는 베란다문을 전면거울삼아 그렇게 춤을 추었다.
음악이 나오면 흔들어대던 아이.
음악이 나오면 흥에 겨웠던 아이.
그게 바로 내 딸.
다만 내 딸은 아무데서나, 어느 누구 앞에서나 춤을 추지는 않았다.
나름 가려서 흔들고 흥에 겨워했던 아이가 바로 내 딸.
그런 내 딸은 6살 때 생전 처음 어린이집에서 예술제라는 것을 참여했다.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유튜브의 웃는 아이라는 채널을 알고 춤을 독학한다.
8살이 되고나서는 춤추는게 더 교태스럽고, 더 역동적으로 바뀌고 표정까지 살아있다.
한동안 딸이 움직이지도 않고 몰입해서 보던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순간 따라한다.
동선을, 표정을, 세심한 손짓발짓하나하나.
이런걸 보고 모든 아이는 무한계 인간으로 태어나고 천재라 하나보다.
한동안은 딸이 이렇게 춤추는게 마냥 신기하고 재밌기도 했다.
어제는 유독 자기가 춤을 출테니 화면보지 말고 자기만 보란다.
그래서 유심이 딸이 춤추는 것을 관람했다.
내 딸은 엄마인 나를 흐뭇하게 쳐다보면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은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면서 뭔가 묘한 감정이 일렁이더니 딸의 모습에서 어린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초등 운동회 때 늘 교단에서 대표로 춤추던 나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유난히 큰 키로 운동회시즌만 되면 학년 대표로 담당 선생님께 춤을 미리 배워서 교단 위에서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학생 중 하나였다.
키만 크고 몸치였다면 선생님이 안 시켰겠지? 아마도 나는 큰 키로 인해 손짓발짓하나하나가 눈에 확 들어오는 장점의 소유자였을테고 나름 춤도 곧잘 췄을테니 매번 운동회 때 남들보다는 미리 춤을 배워 보여주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큰 키로 무용부에서 오라는 제안도 많이 받았다. 허나 나는 무용부 문턱에도 들어가보지도 못했다.
나는 무척이나 무용부 활동을 하고 싶었으나 무용하면 돈 많이 들어간다는 엄마의 걱정에 효심가득한 첫째인 나는 더 욕심내지도 못하고 더 우기지도 못하고 그렇게 나의 욕구를 누르고 포기하곤 했다.
대학교 응원단에 들어가고 싶어하던 나
대학을 입학을 할 때는 응원단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다.
나는 키가 크기에 응원단하면 손짓발짓도 커서 잘 어울리겠다. 잘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허나 나는 응원단에 들어가지 못했다. 입학한 학교에 응원단도 없었고, 입학과 동시 생계형알바생이 되어 그런 활동은 나에게 사치이기도 했다.
나를 비춰주는 딸
나는 내 딸과는 달리 단 한번도 엄마,아빠 앞에서 춤을 춰본 적은 없었다.
엄마, 아빠 앞에서 춤을 출 기회도 없었고, 춤을 춰야겠다고 생각도 해 본적이 없다.
나에게는 어느 누구보다 엄마, 아빠 앞이 부끄러웠고 긴장됐다.
엄마, 아빠 앞에서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그렇게 불편하고 힘들었다.
그랬던 내가 내 앞에서는 거침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고, 욕구를 표현하고 발산하는 내 딸이 솔직히 버겁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내가 해보지 못한 걸 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자꾸 나를 비춘다.
아이는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배운다하여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이는 부모의 억압된 것을 비춰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내 딸은 거침없이 내 앞에서 춤을 추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엄마 너도 어릴 때 이렇게 춤추는거 좋아했지?
춤추는거 좋아하면서도 부인하고 억압하고 살았지?
엄마 내가 비춰줄게.
엄마도 원래 춤추는거 좋아하던 사람이었어.
이제 억압하고 살지마. 나처럼 이렇게 추는거야.
엄마 너도 이제 억압하지 말고 드러내고 살아. 나처럼 해봐. 이렇게.
엄마가 어린 엄마의 억압되었던 욕구들 알아차릴 때까지 난 더 교태스럽고 뻔뻔하고 거침없이 드러내서 비춰줄거야.
딸이 한살한살 커갈수록 나의 내면의 판도라상자는 자꾸 들썩들썩거린다.
딸이 한살한살 커갈수록 딸은 나의 판도라상자를 휘젓는다.
무거운 판도라상자로 훨훨 날지 못하는 엄마를 날게 해주기 위해 엄마의 판도라상자를 휘젓어서라도 판도라상자의 무게를 덜어주려 한다.
엄마 너는 원래 훨훨 날 수 있는 존재라고.
나만 날게 하지 말고 날고 싶던 엄마도 이제는 함께 날자고 그렇게 나를 비춰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