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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미니마니모 Dec 03. 2019

두 번째 회의

간호사 둘의 팟캐스트 좌충우돌 시작기

'늦기 전에 얼른 나가야지.'


 바로 직전의 이 친구와의 약속에 늦었고, 요새 약속들에 모두 늦는 터라. 늦는다고 뭐라고 할 친구는 아니었지만 늦을까봐 괜히 조바심이 났다. 음식물 쓰레기도 함께 버릴 요량으로 양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덜렁이는 노란 봉투까지 들고 나섰을 때였다. 땅이 축축한 느낌이 어색했다. 분명 시멘트 바닥임에도 땅이라고 칭하는 요상함에 이상하다고 생각할 새도 없이 진짜로 비가 오고 있었다.

 후두둑. 비가 온다고 깨닫자마자 빗줄기가 거세지는 모양이라니. 아침에 날씨 어플에서 비 50%라는 글자를 보기는 했지만, 50%에 불과하고 패딩이니까 그냥 모자만 쓰고 나갈까 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계단을 쿵쿵 올라가 짙은 녹색의 우산을 꺼내면서 생각했다.


'시작이 영 별로네.'


 기다란 패딩은 추위를 막아주기엔 부족함이 없었지만 비가 오는 날엔 더없이 거추장스럽기도 했다. 한바탕 짜증이 났지만 늦지 않고 도착한 것에 기분이 좋았다. 때마침 온 친구의 연락은 늦는다는 이야기였지만 괜찮았다. 어쨌든 내게 중요한 건 내가 늦지 않고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어라, 왜 우산 비닐이 없지.'


 생각을 하는 순간 친환경 우산 빗물 제거기가 보였다.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었는데 신기했다. 우산 비닐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나를 다시 한 번 깨달으면서 빗물 제거기를 매일 사용한 척 제거기에 넣고 스윽 슥 문질렀다. 신기하게도 물기가 거의 걷혔고, 누군가의 똑똑함에 또 감탄했다.








 대추와 호두가 섞였다지만 호두맛만 나는 과자와 따뜻한 라떼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카페라는 공간은 참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공간은 같은 곳에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사람은 매일 다르다. 알바생마저도 요일마다 시간마다 다르고 이곳에 오는 나조차도 매일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다른 점이 조금씩 있기 때문에.

 하염없이 생각의 늪으로 빠져들 즈음 친구가 도착했다. 못 본 새 여윈 것인지 금테 안경을 쓴 때문인지 날카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짧은 안부만 나누고 팟캐스트 회의에 돌입했다. 시간이 부족했다.


팟캐스트 제목은?

예명은 어떻게 해야 할지ㅠㅠ

소개 멘트도 짜야 하고 앞으로 짜야 할 것들 투성이!

1화, 2화 ... 4화 그리고 각각에 들어갈 내용들

사실 우리끼리도 잘 모르는 게 많은데? 히히

이제 또 언제 만나서 회의 할 수 있지?


 얼추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 보니 시간이 없었다. 바로 다음 일정을 위해 출발해야 했지만 이렇게 떠나는 것은 왠지 아쉽고 여기까지 와 준 친구에게도 미안했다. 좀 더 깊게 안부 이야기를 나누려는 찰나였다.


"이 이야기 시작하면 너 가기 싫을 걸? 꼭 가야 해?"


 아... 나도 너무나 아쉽고 서운했지만, 다음 일정도 한 달 넘게 가지 않은 터라 꼭 가야만 했다. 오늘은 가야 했다. 미안함과 궁금함이 잔뜩 뒤섞여 고민하다가 친구의 이야기를 더 들었는데 정말 바로 가지 않기를 잘 했다.




 친구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 나이에만 가능하다며 즐기라고 하지만, 막상 겪게 되면 힘든 것인데 어떻게 즐길 수 있겠나. 커리어와 하고 싶은 일 간의 괴리는 언제나 생긴다. 심지어 커리어가 좋아하는 일인 경우에도 그렇다. 일이라는 것은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팟캐스트는 어떨까. 이 또한 관성적으로 하게 되거나 혹은 어려운 일이 닥쳐 왔을 때 일로 느껴지게 된다면 또 다른 하고 싶은 일과의 충돌이 발생하게 되는 걸까. 내가 생각이 너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오늘의 나도 자꾸만 떠오르는 다른 해야 할 일들을 쳐내며 회의에 임한 것에 약간의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친구의 마음 또한 온전하지 않았을지도 몰랐고 조금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스물 여덟 살이고 그럴 나이니까. 이렇게 고민과 걱정들로 점철된 시간들이 마냥 가라앉는 게 아닌 더 높이 뜨기 위한 발판이 되어 줄 거라고 믿으면서 살 수밖에. 우린 잘 될 거다. 우린 스물 여덟 살이고 그렇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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