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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미니마니모 Jan 12. 2020

입을 닫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내가 한 말의 의도는 누가, 어떻게 측정해야 하는가

 그런 적이 있었다. 내가 한 말의 의도는 분명 1이었고 1이라고 믿었는데, 남에게는 그렇게 닿지 않았던 적. 단순히 1로 와닿지 않았거나 10 혹은 100으로 여겨졌는지, 아니면 그와 나의 상황이 달라서였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당사자들에게는 1로 와닿았을지도 몰랐을 일이 당사자가 아닌 사람에 의해서 부풀리고 부풀려졌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의 말은 당사자가 아닌 다른 이의 화를 사서 나를 비롯한 여러 명에게 퍼뜨린 엄청나게 큰 화재를 일으켰었다. 




 시작은 단순했다. 그는 나를 싫어했거나 못마땅해했고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유가 조금은 당황스럽게도 여자애 치고 의견이 세다는 것, 이었지만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고 건너건너 들려왔던 말이라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여자애 치고 세다고 한 내가 말했다는 그 의견이, 내가 아닌 다른 여자 동기들의 의견을 대변한 것이라는 걸, 그 안에는 네가 좋아하던 여자애도 있다는 걸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풍부한 상식과 지적으로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똑똑함이 멋지게 보였다.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고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그를 믿었었나보다. 

 같은 단체에  속해 있었기에 이런저런 일로 만나면 아무렇지 않게 대화했었다. 가끔은 사적인 이야기도 했지만 깊지는 않은 편이었고, 당연하게도 친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그는 다른 사람을 향한 내 감정을 자기 멋대로 부정하고 욕하곤 했다. 나는 그를 점점 좋아하는 것보다는 싫어하는 쪽에 가깝게 되었으나, 그래도 역시 지적인 능력만큼은 인정했고 부러워했다. 

 그러다 어느 덧 내 생일이 가까워졌고, 당연하게도 생일파티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같은 단체 내에서 내가 좋아하고 또 나에게 호의적인 몇 사람, 그리고 외부에서 나의 지인들을 몇 사람을 불러 함께 파티를 하기로 했다. 그들에게만 연락했음은 물론이다. 


 생일 파티 이틀 전, 그는 다른 모임을 통해 우연히 나의 생일 소식을 알게 되었고 왜인지 불같이 화를 냈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곤 몹시 화가 나서 새벽 두 시에 자신이 번호를 아는 나의 지인들을 불러 모아 채팅방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들은 대화를 했던 당사자들조차도 기억에 없는 내용들, 그러나 잘 모르는 이들이 보았을 때 충분히 오해를 살만한 대화의 내용들이었다. 약 8명의 대화를 자기만의 기억들을 재조합해서 모두에게 알렸다. 


 환영회 날, 네가 치킨을 더 먹겠다고 하니까 걔가 쟤, 정말 많이 먹는다고 말했다더라 혹은 네가 새롭게 머리를 하고 왔을 때, 걔가 OO이 머리빨이었구나 하며 놀렸다더라 등 차마 입에 담거나 글로 쓰기에도 부끄럽고 민망하고 유치한 내용들이었지만. 


 나는 채팅방에 초대되지 않았기에 99개의 내용을 다 알 수는 없었고, 그마저도 나를 좋아하고 아껴주던 친구들은 읽다 말고 나왔기에 내용을 다 아는 이는 있을 수 없다. 적어도 내 곁에 남아있는 이들로부터는. 내가 알지 못하는 내용들, 그리고 당사자들만이 아는 분위기가 악의적 감정을 가진 이에 의해 글로 표현되었을 때의 느낌을 나는 상상밖에 할 수 없었다. 무서웠다. 또 어디서 내가 한 말이 꺼지지 못한 담배꽁초가 되어 남아 있지 않을까. 그러다 잘 걸렸다, 하는 마음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 불씨가 되어 흩날리고,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지는 않을까. 공포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초대받지 못했기 때문에. 초대받겠냐고 물었어도 원하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채팅방에 들어가지 못했기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 오빠가 무슨 이런 짓을 하냐며 그 친구를 잘 타일렀다고 나를 위로했지만 나의 두려움까지 잠재울 수는 없었고, 실제로 많이 아꼈던 한 후배가 내게서 멀어졌다. 






 이후 많은 고민 끝에 나는 입을 닫아버렸다. 스물 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겪기에는 조금 많이 아픈 일이었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일찍 교훈을 얻은 것이라 생각하려 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했지만 실상은 아무렇지 못했다. 그럴 수 없었다. 미워하기에도 내가 저지른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돼서 미워할 수도 없었고, 나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고민했다. 쉬워 보이지만 어렵고 어려워 보이지만 쉬운 방법은, 입을 닫는 것이었다. 

 무참히 짓이겨진 마음은 어찌할 새도 없이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 기나긴 휴식의 시간 속에 홀로 남게 되었다. 휴학을 했고 평온한 고향의 집에 내려왔다. 시간은 참 많고도 길었다. 혼자 살 때는 해도해도 끝이 없던 집안일은 금방 끝났다. 더 큰 집에 더 많은 집안일이 있음에도, 부러 창고를 뒤집어 엎고 오래 걸리는 요리를 해도, 시간이 차고 넘쳤다. 그렇게 남고 남는 시간들을 나는 매일 누워서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대처는 조금 달랐어야 했을까.... 내가 무엇을, 아니 무엇을 할 수가 있었을까'


 해답은 찾지 못했다. 그저 나를 들여다보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에만 꼬박 1년을 썼다. 그 후에도 두려워서 사람을 피해 다녔지만 조금은 치유가 되었던 것 같다. 오롯이 나를 나로 봐주고 인정해주는 가족들 틈 사이에서. 그리고 한 가지 변함없는 사실 속에서 점차 나를 되찾아갔다. 


나를 응원해주고 사랑해주는 친구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


 그들은 학교에 나가지 않는 동안 잊힐 만한 시간임에도, 몇 달이 지났어도, 걱정하는 마음 가득 내보이며 연락하고 생각해줬다. 많은 이들의 사랑과 걱정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일 년을 잘 보냈고 나는 괜찮아졌다. 간혹 마음 안에 응어리진 것들은 갑자기 툭 튀어나와 울음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모두가 잘 도닥여주었다. 나는 행운아였다. 





 그러나 해결책을 찾지 못했으니 같은 일은 또 벌어졌다. 아무리 세상 사람이 모두 다르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의 군상은 묶일 수 있었고, 나의 시선에서는 비슷한 사람이었다. 조심스럽게 살았다고는 하지만 나 역시도 사람이기에 부주의할 수는 있었고 예리하게 파고드는 사람들에게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다행스럽게도 나는 변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었기에 이번엔 조금 달랐다. 

 이번에도 역시 내가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는 풀어졌고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 나는 잘은 모른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듣고 당황한 마음에 멀쩡하게 있어야 할 자리에서 안절부절 못한 채 걱정만 했다. 걱정을 할 만한 일을 무언가 했을지 무서운 상상만을 그득그득 머릿속에 펼쳐놓고서. 

 

 신기하게도 상황은 이전과 달랐고 굉장히 빠르게 진정됐다. 내가 변하기로 노력했던 만큼 내 주변도 변했고 성장했고 큰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저 좋은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의 말을 듣고, 친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 사람을 판단하지 않을 만큼 성숙한 어른들. 그들의 대처와 반응을 보고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어느 누군가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나, 그것이 되려 나도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찌르지는 않았나. 








 입을 닫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내가 나쁜 말을 한다면 많은 이들이 잘근잘근 깨물겠지만(물론 아닐 수도 있다), 좋은 말을 해도 오해하고 곡해하는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 아니, 확실히 있더라. 어떤 말을 하든 시기하고 시샘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똑같았다. 특히 내가 말하는 내용이 명확하고 확실한 경우에 더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모호하게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들이 무서워 좋은 의도로 행하고자 하는 것도 못한다면 그것도 너무 슬프지 않을까. 몇 년 간 다수의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배운 것이란 이런 것이었다. 철이 든다는 게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가 좀 더 단단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게 점점 좋은 어른이 되어가는 방향일 것 같다는 생각과 꼭 그렇게 되고 말겠다는 다짐도 함께, 해 본다.




쓰면서, 다시 한 번, 매번 그렇지만, 나는 참 쓰는 걸 좋아하는 구나. 창작하는 내용도 좋지만 기억을 헤집고 추억을 살피는 것을 좋아하는 구나.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쓰고 글자가 적히는 것을 보면서 마음에 편안함을 얻는 구나. 오늘도 익숙하지만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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