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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네 Mar 27. 2019

삶의 부스러기는 오직 다정하다

-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

우리는 인생이
 그저 스쳐 지나간다고 생각한다.

          We feel that life is passing us by.



하지만, 무심하게 창틀에 내려앉은 아주 미세한 먼지 하나하나가 쌓여 창문의 일부가 된다.

먼지는 창문의 냄새가 되고, 창문의 표정이 되고, 창문의 풍경이 되고, 창문의 시간이 된다.

우릴 스치듯 지나간 자잘한 시간들 또한, 창틀의 먼지가 그러하듯 우리 몸안 어딘가에 존재한다.

창틀의 먼지를 털어내, 우리는 우리의 창틀 청소한다.

글을 읽고,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기도를 하고, 생각을 하면서

먼지가 쌓이는 우리 회색의 창틀을 털어낸다.


그러면서 사람의 시간도, 창문의 시간처럼 늙어간다. 병에 걸리고, 기억을 잃어가며 점점 노쇠한다.

이 드라마 속의 대작가 강병준 선생이 그러하듯, 우리도 나이 들면서 기억이 희미해질 테다. 누구도 가는 세월을 거스르진 못할 테니까.



What? Kang Byeong - jun suffered from Alzheimer's disease?


4월 23일,


드라마 속 강병준 작가는 《 4월 23일》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였다. 아버지인 자신도 모르게 세상 속으로 나왔다던, 아버지의 아들의 생일날이 책 제목이 되었다. 자신의 아들 '서준'의 생일을 자신 일보다  선명하몸에 새기듯  기억하였을 그였지만, 그런 아들의 이름을 아들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 '은호'로 부르면서도, 그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알츠하이머라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평생 가슴을 묵직하게 눌렀을 그 아들 서준을, 알츠하이머라는 창틀 먼지로 인해 기억이 묻혀가는 걸, 그도 몰랐을 게다. 누구에게나, 내일이라는 미래는 처음 겪는 일일 테니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아들 아닌 사람을 은호야, 사랑하는 아들아, 라며 나지막이 가라앉아 가지런해진 느낌으로 잔잔하게 부르고 있었다. 아들 서준 대신, 후배 은호를 그리 부르고 있었다.


창틀에 내려앉은 낡은 시간의 먼지들은, 그저 낡은 시간을 타고 푸른 시간 속으로 가라앉는다. 은 것은 제 무게로 침전되고 푸른 것은 아직 말끔하게  말갛다.

오래된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낡아가는 창문을, 이 세상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풍경은 그저 다정하다.

호두껍질처럼 단단하게 자신을 철통 방어하던 정신력이, 오래된 편지처럼 오래된 시간도 파삭파삭 부서져 내려앉는다. 그런 그의 삶의 부스러기는 오직 다정하다.

그의 오래된 편지 속에는 오래된 기다림이

색 바랜 종이 색과 닳은 시간의 먼지 냄새만큼이나 오래, 아주 오래 스미듯 쌓여있다.




하지만 오래 기다린 건 선생의 시간만이 아니었다.

대작가인 아버지 강병준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 시간을 원망하고 따지며 기다려 온 선생의 젊은 아들 서준, 선생의 곁을 흔들림 없이 지켜준 젊은 제자 은호, 선생의 오랜  주치의가 든 고요의 시간들이 선생의 시간과 더불어 한자리에 그저 스미듯 머물러 있다. 그들 삶의 부스러기는 그래서 더 다정하다. 더 깊다. 더 저리다.


삶의 부스러기를 남기고 사람이 떠난 끝은 오직, 다정하다. 거긴 오직, 가라앉아 새하얘진 녹말 분말처럼, 쓸만한 것이 남는다.




은호야, 세상은 여전히
깊은 밤이구나. 어둠이구나.


하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구나.
However,  I am no longer afraid.

그가 떠난 삶의 다정한 부스러기를 매개로 하여, 서준과 은호와 지인의 마음속으로 파르라니 봄풀이 곧이어 돋아나리라. 남은 자들의 마음에서부터 새싹으로 돋아나와, 온 세상 속으로 봄풀은 번지리라. 그리고 끝내는 숲을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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