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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네 Jul 06. 2023

From 《물빛》 2006. 12.


A4용지를 가위로 오린다.


사각사각. 가위는 종이를 먹어치우는 종이의 천적 같기도 하고 종이가 감당할 수 없는, 종이의 삶을 압박하는 인물 같기도 하다. 내가 가위질을 하자 종이 끝이 점점 뾰족해진다. 종이의 가늘어진 끝을 더 작은 예각으로 만들려 할수록, 가시처럼 된 종이 끝은 뭉텅한 가위를 계속 헛손질하게 만든다. ‘조븟한’ 종이는 아래로 향하거나 구겨지면서 가위의 아귀를 빠져나간다. 뾰족한 모서리 끝에 가위를 대고 각을 더 작게 오리려고 끈질기게 노력하지만 구겨지기만 하지 잘리지는 않는다. 더 이상 잘려나갈 각이 없다. 자주 이렇게 장난을 하다 보니 그 속에서 많은 것이 떠오른다.



각을 책 속의 주인공과
연결 지어본다.


각이 더 이상 좁혀질 것도 없게 된 종이는, 아버지와 교장 선생의 아귀에서 자신의 생이 구겨지고 부러지다가 결국은 설 자리가 없어 죽음을 택했던 한스 기벤라트를 연상시킨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섬세한 소년 한스는 아버지와 교장선생의, 공부에 대한 집착 때문에 희생양이 된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의 강압으로 신학교에 들어가고 교장선생의 강요로 착실히 공부를 하였으나 자유스러운 성격의 하일너를 사귄다. 어느 날 학우인 하일너마저도 떠나버리면서 그의 몸과 마음은 무너져간다. 수재이던 한스는 점점 성적이 떨어진다. 급기야 자퇴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빈민거리의 사람들과 사귀고 엠마라는 처녀와 짧고 허무한 교제를 끝내면서 또 한 차례 좌절감을 맛본다.


기계공으로 일하면서 새 삶을 개척하려 해 보지만 고된 노동과 정신적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강물에 빠져 죽고 만 한스의 행적이, 더 이상 뾰족해질 수 없을 만큼 날카로운 종이의 끝에서 느껴진다. 신학교 학생으로서 성경공부를 포기하면서부터 설 자리의 표면적을 점점 잃어갔던 한스. 끝내 인생의 수레바퀴에 치여 생을 마감한 한스. 가위가 난도질을 멈추자 침같이 삐쭉하게 각진 모습으로 피하던 종이의 움직임도 멈춘다. 가위가 난도질을 멈추면 이 예각의 생이 끝나진 않을 것이다.



직각은 진부할 정도로
익숙한 각이다.


네 귀퉁이가 직각인 것이 이 세상에 무수히 많다. 아파트, 책상, 책. 눈만 뜨면 직각으로 된 천장을 보고 직각으로 된 벽을 본다. 직각인 냉장고, 직각인 텔레비전 화면은 보기 싫더라도 매일 봐야 하는 가족과도 같다. 각을 지운 둥근 식탁이 생겼다. 그것을 본 누군가 집도 둥글게 만들어 봤으면, 했다. 집이 둥글면 냉장고, 방, 천장…, 이 모든 것도 둥근 원이 되고 침대도 둥근 벽선을 따라 둥글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 사람도 머리와 몸을 돌돌 말아서 동글동글 굴러다닐 걸 상상하여 박장대소를 한 적이 있다. 사각의 틀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고정관념을 깨 보기 위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파트가 막상 만들어지면 불편해 못 살겠다고 처음에는 아우성을 칠 거다. ‘원이 각을 숨긴다’고 각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직각인 하얀 A4용지가
책상 위에 놓여있다.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니 그 속에서 바다가 연상된다. 『노인과 바다』에서 샌디에고 노인은 소년마저 떠나버리고 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기다림을 바다에서 홀로 감수했다. 84일간을 망망대해에서 대어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심심하면 공중을 나는 새와 이야기를 나누고 하늘의 별과 대화를 했다. 노래를 부르며 옛날을 추억하면서 지냈다. 85일 만에야 청새치 한 마리가 걸려들었다. 길이 2미터 50센티인 대어를 야위고 초췌한 노인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홀로 밧줄을 당겨 올리느라 손에 피가 나고 땀으로 온몸이 목욕을 하면서도 노인의 의지는 굽힐 줄 몰랐다. 상어까지 달려들어 노인의 생명을 위협하고 청새치의 살을 뜯어먹어 청새치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지만 노인은 끝까지 버티며, 낚아 올린 고기를 자신의 집까지 운반해 놓고서야 쓰러진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하얀 A4용지에서는, 샌디에고 노인이 꾸었던 으르렁대는 사자의 꿈까지 연상된다.



다시 가위를 들고,
 둔각을 만들어 본다.


둔각은 직각보다 더 넓은 것 같지만 쓸모는 적다. 둔각에는 책을 꽂아도 침대를 놓아도 책상을 놓아도, 쓸데없는 자투리 공간이 남아 신경 쓰이게 하고 모양새도 나지 않는다. 그 넓음은 불필요한 자투리일 뿐이다. 둔각은『목걸이』에 나오는 로와젤 부인의 허영심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예각이 가시 같다고 하여 얄밉지 않다. 직각이 흔하다고 구태의연해 보이지도 않는다. 둔각이 넓다고 모든 걸 끌어안을 수 있는 건 더욱 아니다. 난 예각의 날카로운 면을 가장 사랑한다. 예각은 직각과 둔각을 위해 희생한 각이다. 자신의 터를 ‘좁히면서도’ 부정한 일에 일침까지 가한다면, 좁은 예각일지라도 멋진 나의 멘토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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