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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네 Aug 16. 2022

그 할아버지는 정말 심리학을 가르쳤을까

 




 요즘 창문을 열 때마다 보이는 맞은편 집 남아공 할아버지네가 자꾸 걸린다. 아니 쪽 방향을 면한다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올 초에 이런 일을 겪어서다.


년 전 우린 타운하우스로 이사를 왔다. 열 두 집이 모여사는 이곳 복합건물은 일반 하우스보다는 더 옹기종기 붙어 있고 1년에 몇 번씩은 반상회 같은 미팅 갖는다.  멀찍이 떨어져 사는 빅 하우스보다는, 이웃들과 왕래가  잦다.  중 10 가정은 호주 사람들이 우리 집을 포함한  가정은 외국인, 즉 앞집 할아버지네는 남아공에서 온 가정이다.  웃 모두 친절하게 대해주고 도와가며 살아가는 정겨운 이곳에 이사오길 잘했다며 만족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사 오기 전부터 아공 그 할아버지와는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이사 올 때는 우연히, 맨 처음 대화를 나눈 사이가 되었고,  딸이 다니는 단골고객이니, 코로나 기간엔 딸이 그의 약 심부름주기도 했던, 이전엔 좀 각별한 사이다. 딸이 그약을 지어와 퇴근할 때 전해주면 그 할아버지는 매번 5불씩 팁?을 주기도 했다. 이웃 간에 5불이라는 현금을 쥐어준다는 게 좀 이상하기도 다. 그 우리가 사양을 하면 자기네 에게도 그렇게 한다 해서  어른이 응원의 차원으로 건네는 거라 생각하며 받아들다. 



나는 부침개, 잡채, 김밥을 만들 때다 한 접시씩 나누어주었다. 그때마다 그는 두 손을 합장하듯 모으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게 한국인의 인사 방식고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잡채가 맛있다 그의 아내가 나의 집에 와서 잡채요리를 배우고 갈 때는, 그녀의 딸네 분량까지 10인분을 싸 주었다. 그때 그녀는 쿠키 박스를 사서 다.



요즘 내가 그 할아버지네와 서먹하게 된 사태의 발단은 코로나 19,
그 공포의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작년 크리스마스 전, 12월 14일 가. 2 동안 시드니를 향하여 내 집을 떠나기 전에 난, 크리스마스 카드와 손수 뜨개질 한 컵받침 한쌍 그 할아버지네를 포함한 몇몇 이웃들에게 선물하고 딸네 집을 다녀왔다. 그 당시에는 호주 국내, 그중 시드니 같은 대도시의 코로나가 이곳 시골보다 엄청 더 심각하기는 했었다. 이곳 시골로 피신한 사람들도 많았.


난 시드니에서 돌아오기 전, 총 4회의 코로나 테스트를 했고 전부 네거티브로 나왔다. 12월 24일 날  귀가 후 10일 동안은 자가격리를 했다.

그리고 1월 4일부터 밖에 나가서 하이, 헬로, 해피 뉴 이어, 하며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날 올 1월 6일이었다. 5호 집에 사는, 평소 나와 친하게 지내던 칼리 할머니는 오랜만이라 반갑다면서 맨발로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여름 대낮 햇살에 달아 시멘트 바닥이 뜨거워져서 맨발을 옹그리며 오는 그녀를 내가 바라보며 웃고 있었고, 그녀의 남편 릭은 주변에서 잔디에 비료를 주고 있었다. 는 집 앞의 나무 다듬는 작업을 방금 마친 후였다. 노동 후 내 몸에는 땀이  상태였다.


 나무 다듬는 일이 재미있고, 솜씨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 ^^



그때, 불현듯,
앞집 남아공 그 할아버지가 나왔다.
내가 하이, 라며 인사를 했으나 아랑곳없이 바윗돌 구르듯 돌진을 해왔다.


대뜸, 저 여자 (She)가 바이러스를 갖고 있다! 면서, 평소에도  큰 음성을, 더 크게 질러댔다. 열두 집이 다 들리도록 소리를 지르면서, 나에게로 바로, 숨도 안 쉬고 건너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난 정신이 아찔했고 어수선했고  혼미했다. 이걸 내 실력의 영어로, 딸도 일 나가고 없는데 나 혼자 어떻게 수습을 , 순간기가 막혔다.  뜰안에서 잘 자라던 고추와 들깨, 빨랫줄에 널어놓은 배추 시래기들은 화들짝 놀라는 나와 상관없이 의연했다. 이럴  라리, 두려움과 수치심 없이 살아도 되는 이런 생물로 태어났으면 더 좋았을까.


뜰안의 고추, 들깨, 시래기다. 이 채소들은 다, 나에게 고향이다.


할배의 막무가내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할배, 내 발 앞에까지 바싹, 자기 발을 들이대고서 이렇게 말한다. " 너, 시드니 갔다 왔으니까 10일 간 격리해야 돼!" 라며 명령조로 대들듯이 혼자 흥분돼서 붉으락푸르락하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요즘도 가끔 떠올라 난 허공에다 고개를 젓는다. 

나는 들릴락 말락 한 작은 소리로 10일간이 아니라, 7일 간만 격리하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난 귀가한 지 13일째라고 했다. 그러자 배가 불 나온  할배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맨발로 나를 향해 걸어오던  칼리,  할머니가 나에게, 돈 워리 돈 워리 하며 사태를   다운 calm down 시켜줘서 내가 그 자리에서 크게 동요하거나 혹은 울음보라도 터트리는 더 큰 불상사는 막았다. 쩜, 그날 칼리가 없었다면 나도 모르게 너무 놀라서 오줌을 지렸을지도 모른다.




집에 들어와 찬물을 들이켰으나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나의 흥분은 그때서야 지 성질머리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다시 칼리네 집으로 갔다. 칼리한테 그 할배가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물어봤다. 나도 돌발적으로 겪은 사태라서 여 영어로 잘못 이해했을까 봐.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바로 이해하고 있었다. 칼리는 "그 할배가  너한테 바이러스 있다" 했다고 또렷하게 말해주었다. 그녀도 인정했다. 진짜 그 할배의 태도가 루드 rude 했다고. 자기도 그 할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며 내 편을 잠깐 들어주었다. 난 고맙다고 했다.


이번에는 우리 집 앞을 지나가고 계시는 릭한테로 갔다. 그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릭은 통상 남*공 사람과 덴*크 사람들이 거만한 편이라고 했다. 더구나 근래에 남아공 그 할배 와이프가 파킨슨 진단을 받아서 예민해져 있어서 그런 돌발행동을 한 것 같다고 하면서, 나를 나름대로 위로해 주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집안에 들어왔는데도 부르르 떨리던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어쩜, 서로가 한국사람이었다면 한국말로 말다툼을 하든지( 생각해보니 난 그런 거 해본 경험은 없지만), 조용히 오해를 풀든지 했을 텐데, 속 더 답답하고 탔다.  배네 집 문을 두드려서 따지고도 싶었으나 내겐 그만한 담력이 없었다.




그날 이후, 이틀이 지 새벽에 내  맡아하던 12개의 쓰레기통을 공동 게이트 안으로 들여놓고 돌아오는데 그 할배가 나왔다. 나를 보고 씨익,  웃고 1초 만에 스치듯 순식간에 바람같이 옆으로  지나갔다. 난, 사과도 참 진국 수준으로 하는구나, 하면서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진정한 사과를 하고 싶었다면 말로 미안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사과를 , 이전보다 더 기분이 다.

요즘은 이런 생각이 가끔 든다. 아버지는 당신의 저 막무가내의 성질머리 떻게, 자기 나라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쳤을까.  더구나  심리학을 가르다니. 돌발 행동에 상처받은 학생은 없을까, 라는 의구심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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