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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네 Apr 12. 2023

호주에서 문화센터 가기 주춤하던 날


즐기러 가는 곳인데 왜,
일하러 가는 양 가기 저어해질까.


이유 없는 무덤 없다고, 내게도 이유는 이랬다. 지난주도 의 1년 동안 다니던 "블랭킷 디스" 교실에 갔었다. 그날은 좀 일찍 가다 보니 빈자리가 많아서 적당한 자리 꿰고 앉았다. 버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은 하이, 홍, 하며 나에게 미소 띤 눈인사만 하고 다들 자기 친구 곁에 찰싹 붙어 앉았다. 그리고 자기네들끼리 잉글리시, 꼬부랑 수다를 라블라 떨기 시작했다.


별안간 나의 절반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제제가 되었다. 가족들에게 소외당한 다섯 살 제제 자기 속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었다. 소녀는 집 앞 오렌지나무에게 가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래, 난 뜨고 있는 꽃송이한테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러면서할머니들의 블라블라 수다를 주워 담으려고 귀를 기울여보았다. 그녀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릴 듯 리지 않았다. 두어 시간 동안 그냥, 부지런히, 털실을 손에 걸어 꽃을 만들다가 집으로 왔다. 외로워서였을까. 미열과 두통이 왔다.




그 이튿날, 목요일은 U3A문화센터에
갔다.


앤과 제인이 반겨주었다. 순의 앤은 젊은 나에게 의자까지 갖다 주며 친절을 베푼다. 오랜만에 오신 벨로리 옆에 앉으란다. 다리수술로 6개월 만에 보는, 팔순이 다 되어가는 벨로리는 자기 남편 40년 전에 오픈한 철물점 문 9시에 열고 2시 30분에 닫는다. 즘은 오는 사람, 가는 손님과 이야기하는 재미로 문을 연다고.


오래되어 익숙해진, 40년 동안 정이 푹 든 그 자리에서, 사람을 맞이하며 그 사람과 이런저런 삶을 나누 어우렁더우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오늘도 그녀 손 손주를 위한 동화책 커버를 바느질하고 있었다. 그녀가  천꽃무늬 장미꽃만큼 화려하지 않으나 안개꽃처럼 수수하고 정겨웠다.


짧은 시간에 인생의 전부를 말하진 않았으나, 멀고 먼 시간, 그 40년을 한 자리에서, 동일종목의 가게를 이어가며, 그들 부부는 별일을 다 겪었을 게다. 누군가는 사간 물건이 맘에 안 든다고 붉어진 볼살을 부르르 떨었을 테다. 때로는 좀도둑도 들었을 테고, 더러는 돈을 안 받고도 물건을 내어주거나, 밑지는 장사도 했을 테다. 그들의 젊음에도, 되고 로운 날들이 좋은 날보다 더 많았을 게다.


40년, 그 속에 든 히스토리는 다 그녀의 가슴에 저장되어 있다가 스스로 스러지거나, 한풀이처럼 이야기하는 것으로 한을 녹이거나, 이젠 오랜 벗이 되었을, 가게놀러 오는 손님들과 마주 앉아, 즐거운 추억으로 서로 수다를 며 매듭을 풀어낼 수도 있을다. 엇보다, 오래 견딘 보람과 자존감도 상당할 게다.


벨로리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블랭킷 디스'에서 뾰족해졌던 내 마음이 둥그스름하게 다듬어지고 있었다. 외로운 제제 고독한 제제가 되고 있었다. 홀로 되어 나에게 전히 집중한다는 고독, 난 고독한 예나네가 되기로 했다. 나도 오, 여기 호주 할머니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내 삶의 히스토리를 이어가기로 작정했다. 지금도 나의 영어가, 호주에서 내 삶에 조금조금 스며들고 있을 것이다. 나의 언어가 현재진행형 긍정의 방향으로 움직임을  믿는다. 나의 고독을 든든한 친구 삼기로 했으니까.


저 붉고 뜨거운 태양이 홀로 아름답던가. 고독한 시간을 하염없이 하늘강을 건너며, 더불어 아름답지 않던가.



벨로리할머니가 만드신 북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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