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할머니다.
어느 날은 여인으로 부르기보다, 할머니란 부름이 더 정감을 지닌다. 여인의 감성이 푸른 싱그러움이라면, 할머니의 감응은 무르익어 단즙이 푹 고인 열매다. 우리에게 더해지는 연령에 따라 모두 다, 아직 익어가는 과일과 이미 다 익은 과일에 비유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삶의 모습이 때로 열매에 맞닿아진다. 나이에 비하여 좀 싱그러워도, 팔순이 한참 지난 그녀에게는 할머니라는 호칭이 적합하다. 프리티 그랜 마더.
그 할머니가 지난주 월요일에 꽃게 두 마리를 들고 오셨다. 베란다 볕이 환한 오후 두 시 즈음에, 커다란 쇼핑백에다, 붉게 찐 꽃게를 넣어서 어깨에 메고 오셨다. 바다가 가까운 이곳은 통통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꽃게와 새우를 잡아와서, 바닷물에 발갛게 쪄먹기도 한다. 찌는 과정을 떠올리면 파닥대는 생물들한테 미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찐 대하와 꽃게 맛이 일품이라는 건 감출 수 없다. 과일도 과수원에서 갓 따온 열매의 단물이 제 맛이듯, 시푸드 마켓을 거치지 않고 배에서 바로 내린 생물도 그렇다. 혀와 맞닿는 미감이 아직 남아있는 생기로 보들하고 달짝지근하다.
할머니의 표정이 여느 날과 달랐다.
마음속에 뭔가, 속 시원하게 꺼내놓지 못할 중량감이 내려앉아있는 듯했다. 나는 그분의 속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내 추측이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 그저 어깨에 메고 오신 붉은 꽃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렸다. 할아버지 친구가 배를 타고 나가 꽃게를 잡아서 쪄오면 가끔 나눠주시는, 내가 좋아하는 시 푸드, 꽃게가 정말 맞깔스럽다는 문장을 곁들였다. 할머니는 반시간 동안 베란다에 앉아 그저 일상을 이야기하다 일어나셨다. 난 게이트 앞까지 배웅을 하러 할머니 팔짱을 끼고 따라갔다. 마당 가운데서 할머니가 불현듯 나를 향해 돌아섰다.
홍, 비니 하나 뜨개질 해 줄래?
내 손을 끌어 할머니 댁에 데려가서 예전에 나와 같이 떠 둔 증손주들의 비니모자 두 개를 내보여주었다. 증손주가 셋인데 모자 하나가 모자라서 혼자 끙끙 수심에 잠겨있다가 꽃게를 들고 내게 찾아오신 거였다. 더구나 그 증손주는 마음이 남들과 좀 다르기까지 하니,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다. 나도 그때 마침 영어교실을 다시 등록하여 정신이 좀 없었고 바빴지만, 아침저녁으로 틈 날 때마다 부지런히 뜨개질을 했다. 사흘 만에 할머니가 그토록 사랑하는 증손주의 파란 비니모자를 완성해서 목요일 아침에 갖다 드렸다. 할머니는 고맙다며, 남은 실 한 타래는 기어코 되돌려주셨다. 금요일 날 네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가서 당신의 증손주에게 모자를 전해주실 할머니를 생각하니 내가 더 기뻤다. 사실, 뜨개질을 할 때는 조금 피곤하고 살짝 귀찮기도 했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뜨개질을 해서 급하게 전해드리느라 깜빡하여, 완성된 비니사진을 못찍었다.
감사하게도 할머니께 떠드린 비니모자가 궁금해하시는 작가님들이 계셔서, 이전에 떴던 비니를 올려봅니다. 다 동일한 무늬이며 오직 색상만 다릅니다. ^^